집사람이 내 월급만으로는 살기 너무 힘들다며 대구에 빵집을 내면서 주말부부로 살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만 5년이 다 되어 간다. 토요일, 아내랑 빵집 문을 같이 닫고 집에 오니 밤 11시 반이 다 되어 간다. 평소 10시면 꼭 잠자리에 들던 작은놈까지 눈이 초롱같다.
"학원에서 전화 왔었어."
"응, 가게서 받았다. 아빠하고 의논했는데 상원이 겨울 방학 전까지는 스스로 하루 두 시간씩만 공부한다면 학원 안 가도 되는 것으로 했어. 참 이렇게 말하고 보니 그렇네. 여자들 좀 이상해. 혼자 결정하기 곤란할 때 애들 아빠와 의논해 본다고 하지 않고 물어보고 전화하겠다고 해. 물어본다는 것은 둘 관계가 평등하지 못하다는 말이잖아. 부부사이는 평등한 것인데. 그래서 한 쪽이 죽었을 때 절하지 않잖아. 제사지내면서도."
"그건 그런 것 같네."
"그렇지만 아이들은 우리 아빠가 오히려 이상하다던데."
"뭐가?"
"아빠가 주말이면 집에 와서 설거지랑 청소하고, 특별식도 만들어주고 공부도 봐주면서 엄마 가게 일까지 돕는다고 했더니 이상한 아버지라네."
"엄마가 가사 일만 보던 때에도 그렇게 했었잖아. 기억나니?"
"응."
"아버지 같은 사람 잘 없지 뭐."
옆에서 그냥 듣고만 있던 작은놈이 한 마디 거든다.
"난 나중에 상원이 집에 못 갈 거야. 지 아버지 하는 것 그대로 다 할 텐데 눈이 시어 어떻게 봐."
"엄만 이럴 때 보면 너무 이기적이야. 평소엔 안 그러면서.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정말 꼭 맞는 말이야."
"엄마, 상원이 장가간 다음 하는 꼴 눈꼴시거든 우리 집에 와. 사위가 잘 하는 것은 보기 좋잖아. 그리고 아빠는 사위 보거든 지금보다 더 잘 시범 보여 주고. 히~."
신혼 초에 감명 깊게 읽었던 시다.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 속옷 빨래를 하면서 /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 똑 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 세상이 가르쳐준 대로 /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 노조를 만들면서 / 저들의 칭찬과 표창장이 /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 투쟁이 깊어갈수록 실천 속에서 / 나는 적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 노동자는 이윤을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 박노해의 <이불을 꿰매면서> 전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