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무상함 앞에 한 집씩 허물어져 간 집들 사이에 그나마 형체라도 남아 있으니 다행이다 싶어 겨우 버티고 있는 나의 옛집을 둘러보는데 담벼락은 이미 오래전에 허물어진듯하고, 정지간 아궁이엔 불 땐 흔적 없이 썰렁한데 부뚜막위엔 붉게 녹슨 무쇠 솥만이 묵직이 눌러앉아있다.
어느 한곳도 성한 곳 없이 망가지고 허물어져 가는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뒤 모퉁이에 우뚝 솟아있던 황초고야마저(잎담배를 새끼줄에 줄줄이 엮어 첩첩이 묶어 달아 불을 지펴 말리는 곳) 옛 흔적만을 남긴 채 폭삭 주저앉은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저 더듬이처럼 옛 기억들을 더듬어본다.
골목마다 질경이처럼 질기게 뿌리를 내리려다 하나, 둘 떠나버린 그 가스나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내 파릇했던 꿈을 보듬었던 고향아!'
그저 세월 앞에 푸석푸석 형체마저 잃어가는 고향 모습을 마음속 깊이 '찰카닥!' 또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긴 채 마을 어귀를 넘어선다.
돌아오는 산기슭마다엔 억새의 하얀 손짓에 '가을은 익어 가는 가~' 어느 유행가 가사를 흥얼거리며 가랫재를 넘어서니 차창 밖으로 유유히 넘실거리는 임하댐 짙푸른 물빛에 우리의 시선이 사로잡힌다.
어쩜 저렇듯 태연할 수 있을까? 내 추억 길 다 삼켜버리고 대대손손 지켜오던 고향땅 마저 물 빛 속에 다 담아버린 임하댐. 타향객지살이 고달픈 향수에 젖은 시름 달래려 순간마다 마음 한 자락 구름에 둥둥 실어 달려오는 길손이 될 뿐인데…
"저 시퍼렇게 일렁이는 너울아 / 너무 힘두어 출렁이지 말아라 / 우울컹 거려오는 옛 추억에 목이매여 / 자꾸만 시큰하게 펴져가는 / 내 콧잔등에 여운을 어찌하라고?"
페달의 가속도가 붙은 봉고차는 안동방향의 이정표를 향해 열심히 가로수를 뒤로 젖힌다.
저만큼 안동댐이라는 이정표 방향에 따라 차를 우회전 하여 조금 가다보니 월영교가 우람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댐 제방아래 보조댐 위를 가로질러 놓여진 나무다리인 월영교.(사진)
건너편 안동민속박물관, 민속촌, 석빙고, 월영류까지를 연결하는 월영교는 국내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길이 387미터, 폭 3.6미터)인데 한가운데에 팔각정으로 건립한 월영정이 있다.
"월영정에 올라 / 시원한 강바람은 두 땀을 보듬고 / 가만히 눈감아보는 나를 향해 / 환한 낯빛으로 떠오르는 보름달 그대는…"
한 수 그럴 듯 한 시라도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은 잠시,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난 우리는 건너편 민속마을, 석빙고, 월영류를 두루 둘러본 뒤 안동댐으로 향했다.
우와! 원두의 물빛인가?
안동댐을 돌아 나오는 우리는 푸른 물빛위로 나룻배를 띄워 마음의 노를 휘휘 저으며 달리다 형형색색으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에 그만 마음이 더 흔들리고 만다. 가는 곳마다 잘 다듬어진 꽃길은 안동 사람들의 훈훈한 인심인 듯 느끼면서…
다시 도착한 곳은 하회마을. 우리나라 유교문화의 본향, 전통문화의 본향인 고택과 초가집, 양반과 평민의 삶의 모습들은 그런대로 잘 보전되어 전하고 있었으나, 삶의 애환이 더 많이 담긴 하층민들의 생활 모습은 찾을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내 이렇게 찾아왔듯이 전국에서 찾아드는 관광객들에게 짓눌러 몸살을 앓고 있는 모습과 상혼에만 너무 치우쳐져가는 모습에 왠지 무거워지는 마음.
서둘러 도착한 '병산서원'은 서원 앞산의 모습이 병풍과 같다하여 병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한다.
그곳은 류성룡 선생의 영전을 모셔놓은 서원이다. 이름 그대로 병산서원의 수려한 주변풍경에 우리들의 마음은 그만 얼큰하게 취한 노객처럼 취기에 들떠 오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사 백미의 하나인, '만대루'. 그 누각에 올라 우리를 굽어보는 병산을 바라보니, 그 옛날 귀품 넘치는 유생들의 대쪽같았던 푸른 절개의 혈맥인 듯이 흐르는 강물, 보드라운 살갗처럼 감싸 안은 금모래 빛에 우리들의 취기는 절정에 이르러 마구 모래사장 위를 뒹굴고, 류성룡 선생의 쩌렁쩌렁한 호통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면서 우리는 그곳을 떠나온다.
해는 서산을 향해 뉘엿뉘엿 뒷걸음질치고 돌아갈 길이 먼 우리의 마음은 페달위에 가속도를 더 한다.
안동을 떠나 영덕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내 고향 마을 어귀 길을 지나고 진보를 따라 신촌이라는 마을에 잠시 머물러 알싸한 사이다 맛을 내는 약물 몇 모금으로 목을 적신다음 황장재를 넘어 오십천 길 따라 달리는 머리위로 별빛이 와르르 내려와 앉는다.
어둠 컴컴한 길에 영덕은 언제 지났나 싶은데 강구항엔 밤배의 불빛들이 고동소리에 뒤 섞이어 출렁이고, 우리는 옆길 새는 게 다리를 쫓아 이곳까지 왔음에 게 다리를 뜯으며 쓴 소주 한잔으로 서로 건배를 건네고 오늘 천성산 시담회 여름기행의 긴 여정을 짜릿하게 목젖에다 적시어본다.
<끝>
조경혜/ 영산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수강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