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아직도 먼동이 트지 않은 이른 시간에 할아버지는 행장을 차리고 대문을 나선다.
행장이라야 길을 고를 괭이 한 자루, 풀을 벨 낫 한 자루, 쓰레기를 주워 담을 자루 하나가 모두다.
집을 나서 산 들머리에 이르는 데만도 30분은 족히 걸리겠고, 거기서 산 정상까지 오르자면 또 한 시간 남짓 땀을 흘려야 하는 만만찮은 거리다.
젊은이라도 버거운 산행이련만, 연치 여든 여섯이신 노인이 날마다 산을 오르는 것도 부족해 비에 패인 등산로도 고르고, 길가에 아무렇게나 자란 풀도 베고, 생각 얕은 등산객들이 무심코 버려놓은 쓰레기를 줍는 일까지 도맡아 하신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물금읍 범어리 '동중마을'에서 제일 연세가 높다는 장몽돌 할아버지.
아직도 정정해 보이는데 다만 귀가 어두워서 말씀을 나누기가 예사 어렵지 않다. 다행히 동행한 이 마을 방치인 이장이 거들어 주어 어렵사리 대화가 이루어졌다.
"비가 억수로 오는 날이야 우짤 수 없제. 안 그라믄 하루도 안 빼고 산에 가는기라. 벌씨로 (벌써)한 30년은 됐는 갑소. 내하고 같이 산에 댕기던(다니던) 사람들도 인자는(이제는) 다 저 세상 사람이 됐는기라. 내보다 나이도 밑인데…"
큰 아드님이 55세, 3남 2녀 자제분이 저마다 반반한 일가를 이루고 손자 손녀들도 대학을 나왔거나 현재 대학을 다니고 있을 만큼 다 자랐다니, 10여 년 전에 마나님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여생을 보내시는 것 말고는 할아버지로서는 다른 아무 여한이 없으시겠다 싶다.
번듯한 2층 벽돌집하며 집안 가재도구들로 보아 살림살이가 꽤 여유로워 보이는데, 할아버지는 여전히 잠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신단다.
"산에 올라가면 기분이 참 좋제. 그래서 죽을 때까지 산에 댕기믄서 길도 고르고, 풀도 비고(베고) 씨레기(쓰레기)도 주울끼라."
젊을 때는 '두주불사'였지만, 요사이는 다른 술은 마다하고 어쩌다 맥주 두어 잔 마시는 것으로 낙을 삼는다는 할아버지, 담배는 입에 대지 않는단다.
"이전(옛날)에 무신(무슨) 공사를 한다꼬 산길을 막아 뿌리서 내가 여드레 동안 새로 질(길)을 맹근 적이 있는기라. 거기 바로 지금 등산로제. 그때 내가 나뭇가지에 철봉을 걸치가지고 철봉대를 했는데 나는 지금도 턱걸이를 한 스물 개는 할 수 있지. 젊은 사람도 내만치 하는 사람이 밸로 없어."
스스로 힘자랑을 하고는 주름진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어린 아이처럼 보였다면, 어른께 실례되는 일일까?
그때 할아버지가 만든 철봉대가 시초가 되어 오늘날의 체육공원이 되었다는 방 이장의 설명이다.
"어르신은 소시 적부터 농사일을 하셨는데 지금도 텃밭을 가꾸시면서 한시도 일을 손에서 떼지 않으십니다. 오늘 아침에도 산에 다녀오신 후 곧장 밭에 나가 조금 전까지 고구마를 캐셨습니다. 우리 마을에 이런 훌륭한 어른이 계셔서 마을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은 마을의 큰 자랑이지요." 방치인 이장 역시 할아버지 칭송에 방치인 이장의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다.
할아버지께 작별을 고하고 방 이장과 함께 새벽에 할아버지가 다녀가신 오봉산을 찾았다. 점식 때여서 그런지 등산객은 드문드문 보일 뿐, 할아버지 발길이 스쳐간 산길이 호젓하다. 등산로 어디에도 담배꽁초 하나 보이지 않고, 길섶은 풀 한 포기 없이 말갛다.
마침 체육공원에서 어린 손자를 데리고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등산객을 만났다.
"아, 그 어르신 말씀입니까? 그 어르신이야 법 없어도 사실 분이죠. 여름 내내 풀을 베고 비가 오고 난 뒤엔 빗물에 패인 산길을 고르셨는데 누가 돈을 준다고 해도 그렇게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침마다 같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기천 원씩 거두어 설과 추석 대목에 어르신께 양말이나 작은 소품들을 선물로 드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르신의 정성이나 노고에 무슨 보답이 되겠습니까? 이런 분은 시에서 '자랑스러운 시민'으로 표창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인근 현대아파트에 산다는 전영길(62)씨의 말이다.
아무쪼록 장 할아버지가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서 변함없이 존경받는 어른으로, 마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산길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