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쌀쌀한 기운이 교정에 가득하다. 겨울이다. 남쪽 지방에 금방 눈 소식이 내릴 리 없지만 눈과 성탄제가 그리워진다. 아이들도 마지막 시험을 치고 나면 온통 방학 날짜를 기다리느라 모두들 환하게 웃으리라.
며칠 전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몇 년 전 중학교를 졸업하고 올해 대학을 거쳐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는 제자의 편지였다. 면접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에 내 안부를 묻는다. 사회에 나가기 전에 겪는 막연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곳곳에 배어 있다. 메일을 받고 답장을 쓰면서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교사는 나무와 같아야 한다. 언제나 그곳에 서 있는 사람,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 고통스러울 때 그늘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1년을 돌아다 보면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다.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힘든 일도 숱하게 일어났다. 무슨 양언니, 양동생은 그리 많은지, 돈은 왜 빌려가서 안 갚으며, 친구들끼리의 다툼은 일과처럼 일어났고 아직도 질기게 남아있는 권위주의 문화 때문에 선후배 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고운 정과 미운 정이 골고루 들었다.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차별'이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아이만 좋아한다는 불평이 늘 따라오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차이'에 관해 이야기해 준다.
교사는 '차이'를 인정할 뿐 '차별'은 없다고! 정말 그런가? 스스로 나에게 물어보면서 나름의 확신을 하고 다시 이야기한다. 분명하다. 개개인이 가진 능력의 차이, 성격의 차이는 인정해야 한다. 공부 못하는 것이 죄가 아니지만 공부 잘 하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다. 좋은 성격을 가진 것도 하나의 능력이다. 능력을 계발하고 키우는 곳이 교육이며 학교다. 그래서 착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를 귀여워하고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사고치는 아이를 차별하는 것은 아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게 만든 뒤 소위 '문제아'에게 교사는 다양한 사랑을 베푼다. 공부 잘 하는 아이에게 쏟는 시간보다 사고 치는 아이에게 쏟는 시간과 열정이 몇 배나 많다. 그 애정을 느끼지 못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 애정이 오롯이 살아나는 경우가 졸업 후다. 힘들 때 아이들이 기대러 온다. 그리고 지난 날을 따뜻하게 떠올리고 서로 격려하고 힘을 내서 돌아간다. 그럴 때 교사는 나무가 된다. 언제나 한 자리에 서 있는 존재, 일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만 서두르지 않고 한 길을 걷는 존재, 다 떠나고 없을 때 다음 봄을 준비하는 나무가 된다. 삼백 예순 날 마냥 섭섭해 울면서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찬란한 슬픔의 나무들에게 좀더 힘내시라고 권하고 싶은 11월이다. 선생님들 우리 함께 힘을 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