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참 좋죠?" 하는데 원수진 사이가 아니라면, "눈은 뭐 하러 달고 다니나 몰라? 별 걸 다 물어보네."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날씨 이야기 같은 것은 서로간의 공감을 확인함으로써 부담 없이 말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인사치레 말이기 때문이다.
대개 형식적이고 어색한 상황일수록 이런 정서적인 말을 길게 한 다음 본 이야기를 시작한다. 딱딱한 사실을 따져야 할 때에도 말 잘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흥으로부터 시작된 정서를 사실과 함께 자연스럽게 풀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의 출발은 흥이요, 느낌이다. 시는 사실이나 생각을 느낌으로 일으켜서 정서(情緖) 속에 담아 풀어내는 말하기이다. 흥(興)으로 출발하여 정서로 담아내지 않은 생각이나 사실이라면 시라고 하기 어렵다.
우리 문학사에서 개인 서정문학의 출발이 되는 유리왕의 황조가를 봐도 그렇다.
翩翩黃鳥 / 펄펄 나는 꾀꼬리
雌雄相依 / 암수 서로 정다운데
念我之獨 / 외로워라 이 내 몸은
誰其與歸 / 뉘와 함께 돌아갈꼬.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 전문
실처럼 휘늘어진 푸른 버들가지 사이로 포롱포롱 오르내리는 편편(翩翩) 황금 같은 꾀꼬리 암수 한 쌍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는 모습이 정답기 그지없다. 맑은 초록으로 늘어진 수직선의 입체인 버드나무를 배경으로 높낮이와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빛나는 황금빛 곡선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봄날의 싱그러운 생명이 사랑으로 무르녹는 그림이다. 흥이요 느낌이요 정서다.
그런데 그 그림 속의 꾀꼬리가 아름답고 정겨울수록 짝 잃은 내 몸은 더 서글프다. 내 간장은 녹아내린다. 그림 속 한 부분이 빛나면 빛날수록 그 옆의 그늘은 더 짙은 음영이 되는 것이다.
다른 옛 노래를 하나 더 살펴보자.
호미도 날이 있지만 / 낫같이 들 리도 없습니다. / 아버지도 어버이시지만 / 어머님 같이 사랑하실 이도 없습니다. / 위덩더둥셩 / 아소, 임아 / 어머님 같이 사랑하실 이도 없습니다.
고려 가요 <사모곡(思母曲)> 전문
이 노래를 아버지의 무덤덤한 사랑을 무쇠로 만든 무딘 호미 날에, 어머니의 자상한 사랑을 금속의 날카로운 낫날에 빗댄 것이 흠이라고 깎아내리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시와 노래의 출발이 흥이라는 것을 읽지 못한 탓이다. 아버지의 무심함에 대한 원망과 애틋한 어머니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그저 늘 보는 일상의 사물로부터 느낌을 일으켜서 그 흥을 풀어낸 것으로 읽으면 농사만 짓고 있는 시적자아의 소박하고 고졸한 정서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졸시 두 편 덧붙인다.
구절초 / 뽀얀 얼굴 / 씻지 않아도 맑은데 // 가을비 / 연 사흘 / 쉼 없이 내린다 // 씻어서 맑아질 양이면 / 나도 벗고 맞으리
졸시(拙詩) <가을비> 전문
물은 몸을 낮춰 제 속 깊이 / 하늘을 담고 / 하늘은 몸을 굽혀 / 제 속 깊이 물길 흘리네 // 물은 산굽이마다 힘껏 몸 부비며 / 제 속으로 바람 풀어 놓고 / 나무는 그리움으로 한껏 발돋움하네
졸시(拙詩) <개울 건너며> 전문
처음 것은 앞의 두 시처럼 흥으로 시작해서 끝에 내 생각을 풀어 보인 것이지만 뒤의 것은 느낌만 드러내고 내 생각은 감추어 두었다. 정서의 흐름 속에서 독자가 쉽게 내 생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사물을 통해 존재의 이면을 떠올리는 현대시의 한 전형 중 하나인 짧은 경구와 같은 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먼저 몇 마디로 자연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흥이요 거기서 존재의 이면을 발견하여 드러내는 것이 흥으로 이끌어낸 생각이다. 앞에 흥이 있어서 뒤의 생각까지 흥으로 물들여 놓아 경구가 그냥 경구가 아니라 시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