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도공을 품고 사는, 시도 쓰는 최 군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목사님도 오기로 했거든요. 먼저 그 식당에서 보죠. 전 조금 늦을 수도 있어요. 그릇 구운 것 몇 곳 전할 곳이 있어서요. 늦거든 이 목사님이랑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참대밭께 놓인 샘물받이는 / 되 반 깊이로 패어 있다 / 바위는 속엣 것 깎아 낸 뒤 / 비로소 한 바가지 / 생수를 받는다 // 유월산 / 푸른 봉우리 하나 품으려고 / 영취산 구비 떠돌아다니다 / 맛보는 / 찬물 한 모금 / 아, / 몸서리치게 느껴지는 / 내 속의 / 검은 산봉우리들
이창희의 <샘물받이> 전문
담자면 비워야 한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바위도 제 속을 깎아 내어 한 바가지 생수를 받아 두었다. 그 물 한 모금 마시고 내 속을 견주어 보니 몸서리치게 검은 산봉우리들이 들어차 있다. 바위는 속을 비워 생수 속에 유월 푸른 봉우리와 같은 도(그림자)를 채웠는데 나는 그 도를 마시고도 속을 비우기는커녕 검은 산봉우리 같은 욕심만 가득 채워 넣고 있다.
"큰놈이 이제 고3일 텐데. 여전히 공부 잘 하죠?"
"제 분수도 모르고 한의대 간다고 하네요."
'한의대'라는 말에 억양을 주지는 않았지만 딸을 떠올린 이 목사 얼굴에 은근히 기쁜 빛이 돈다.
"한의대 지망하는 정도면 정말 잘 하는데요 뭐. 형은 정말 좋겠습니다."
"하하, 참, 부모 욕심이란 끝없죠."
"자식 공부 욕심은 비우기가 참 어려워요. 그 자주 보는 모의고사, 중간, 기말고사 한 번 볼 때마다 마음 비우겠다고 하면서도 점수 때문에 마음 흔들리는 것 보면."
많이 늦는다고 둘이 한 마디씩 하는데 최 군이 들어선다.
"야, 너 양반되기는 글렀다. 네 말 하자마자 들어서냐."
"하하하, 나는 그릇 굽는 사람이니 양반 아닌 게 당연하죠."
"시도 쓰잖아."
"본업이 도공이잖아요."
"그래도 현대 '대음무성(大音無聲)' 그릇 못지않게 참 좋은데."
"스스로 '참 탁하다'고 하지만 현대만큼 맑은 사람 잘 없지."
통도사 자장암 계곡에 / 무심히 앉다 / 물소리 듣다 / 참 곱다 / 물 안에 소리가 들었더라 / 나무 안에 / 바위 안에 / 저 소리 가득히 감추고서 / 어쩌다 스치는 인연 길에 / 툭 한마디 한다 / 참 곱다 / 내 안에 가득한 내 소리 / 누군가 나를 툭 두드리면 / 참 / 탁하다
최현대의 <대음무성> 전문
"일은 잘 풀리고?"
"담부터는 형님이 가마로 오셔야겠어요. 이렇게 가지고 오는 것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네요."
"그렇게 바빠진다니 좋네."
"그릇 나중에 집에 가서 보세요. 그런데 형님 머리가 아주 소금밭이 되었군요. 이제 염색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이들 앞에 서자면."
한 잎 / 두 잎 / 낙엽이 지는 / 적막한 숲 속 길을 // 울면서 / 살다 갈 날 / 얼마 남지 않았다고 // 네 등잔 / 그 들기름은 / 얼마나 남았냐고
이창희의 <솔매미 우는 寒露節> 전문
한로절이 되었으니 낙엽진다. 낙엽지는 숲 속 길에 솔매미가 운다. 살다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리고 내 소리 듣는 너 인간은 네 생명 태울 들기름이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다.
누가 나를 툭 건드려 듣기 거북한 탁한 소리가 날까 겁이 난다. 내 속에는 얼마나 큰 검은 산봉우리들로 차 있을까. 내 등잔에는 들기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세 사람 모두 술잔을 잠시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