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3월 홍세화는 회사의 출장 명령을 받아 프랑스로 떠났다. 잠시일거라 생각한 그 출장길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남민전사건'으로 인해 무려 20년간 지속되었다.
어쩔수 없이 프랑스 망명생활을 하게 된 홍세화는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그 누구도 홍세화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던 1995년, 그는 한권의 자전에세이를 발간했다. 바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였다.
자신이 프랑스 택시운전사로 일하며 보고 느꼈던 프랑스 사회와 우리사회의 괴리감, 학생운동시절의 추억 등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대박'을 터트림으로써 홍세화라는 이름을 다시 세상에 들어내게 했다.
그리고 1999년 6월 14일 홍세화는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해 꿈에도 그리던 조국땅을 밟아보게 되었다.
홍세화가 강조하는 것은 볼테르가 말한 '똘레랑스' 즉 '관용' 다시 말해 나와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20년간 살아온 홍세화가 보기에 한국사회는 '엥똘레랑스(불관용)'사회, 즉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다. 획일한 사상을 강요하고 그에 벗어나면 '국가보안법'이라는 UN에서 '악법'이라고 공인한 무기를 휘두르는 사회를 그는 인정할 수 없다.
홍세화 그는 앞으로 '똘레랑스'가 충만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똘레랑스'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는 '엥똘레랑스'를 단호히 배척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설파하고 있다.
언제쯤이면 홍세화가 말하는 '똘레랑스'가 충만한 사회가 만들어질까. 하루빨리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