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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시가 있는 마을]결별
사회

[시가 있는 마을]결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11/25 00:00 수정 2004.11.25 00:00

 중학교 2학년 작은 녀석이 며칠 앓았다. 지난 11월 11일을 며칠 앞두고 짝사랑 200일이라며 제 짝사랑에게 빼빼로데이 선물로 뭘 하면 좋을까 물을 때만 해도 제법 생기가 돌더니 엊그제 밤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풀죽은 모습이 많이 아픈 것 같았다.
 "이모랑, 엄마랑 만든 빼빼로데이 선물 잘 전했니?"
 "응."
 "그런데도 그 애랑은 여전히 잘 안 되니?"
 "응, 이제 포기할까 해요."
 "왜?"
 "우리 반에만 해도 경쟁자가 다섯이나 되는데다가 걔는 벌써 고2 수학문제 풀고 있고 영어 토플 공부하고 있어요. 게다가 걔가 좋아하는 녀석까지 따로 있는걸 뭐."
 "누군데?"
 "10반 반장인데 키가 180도 넘어요."
 "나중에 네가 더 클 수도 있는데. 그리고 네가 조금만 열심히 하면 걔보다 공부 더 잘 할 수 있잖아. 너는 정말 잘 할 수 있어."
 "지금은 내가 영 작은데 뭐. 성적도 처지고."
 "걔가 10반 반장한테 그날 선물하는 것 봤니?"
 "응."
 "첫사랑은 짝사랑이 좋은 거야. 첫사랑이 바로 이뤄지면 언제 공부하겠니. 학생이. 좀 가슴 아프더라도 나중에 네가 더 큰 사람이 되라는 뜻일 거야. 아마. 정말 좋은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 예방주사 맞은 셈 치렴." 괜스레 마음이 짠~하다. 이런 말이 뭔 도움이 될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로 온다 /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 / 사랑하는 이여 /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전문-
 
 기다리는 동안의 심정이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로 온다'고 한다. 조선 초의 위대한 성리학자 중 하나인 화담 서경덕 같은 이도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라고 했다. 객관적 자연현상을 주관적으로 변용한 것이다.
 '문을 들어서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고 한다. 이런 경험 해보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물론 이 시에 나오는 '너'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만 읽어도 충분하지만 내가 추구하고 갈망하는 어떤 것으로든 읽을 수 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 밖을 떠도는 겨울 안개들아 /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는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의 <빈 집> 전문-
 
 아픈 만큼 큰다고 한다. 작은 녀석도 며칠 앓고 나면 불쑥 자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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