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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우리시대의 인물] -나혜석-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사회

[우리시대의 인물] -나혜석-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11/25 00:00 수정 2004.11.25 00:00

 193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나혜석, 주부였던 그녀가 애인 '최린'과의 외도사실을 인정하며 그래도 남편 '김우영'은 자신의 생활을 편안하게 해주므로 가정은 지킬 것이라는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것이다.
 당시 사회분위기상 그것은 청천벽력 같은 폭탄 발표. 외도는 하되 가정은 지킨다는 것은 '남자'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지 '여자'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남녀평등과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대한 나혜석의 도전은 수많은 진보적 여성들에게 힘이 되었고 '나혜석'은 곧 '여성해방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나혜석의 말년은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다. 평탄은 커녕'이혼고백서' 발표 이후 집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매장' 당하는 한스런 세월을 보냈다.
 수천년 이어온 남성우월주의와 500년 유교사상에서 굳혀진 남존여비 사회에서 나혜석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마녀'와도 같은 존재였다.
 나혜석은 그에 굴하지 않고 그녀를 파탄의 늪으로 몰아넣으려는 남성위주 사회에 저항하는 가운데 자유의 몸으로 독자적 삶을 살아가며 <창가에서>, <소녀>, <화령전 작약>등의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다.
 하지만 1935년 '조선관'에서 가진 작품이 사람들의 냉소와 무관심으로 실패에 끝나면서 그녀의 작품 활동은 사실상의 종말을 고하게 됐고, 1948년 12월 시립 자제원 무연고 병동에서 5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한국 최초의 여권 신장론자이자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였던 나혜석.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효원공원 옆에는 그녀를 기리는 '라혜석 거리'가 조성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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