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와서 교편을 잡은 이래 몇 번은 바꿀 기회가 있었지만 바꾸지 않았고, 몇 번은 바꾸고자 했으나 바꾸지 못한 가운데 한 울타리 안에서 스무 해를 보냈다.
교단에 처음 설 때의 설렘과 초발심을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잘 지키고 가꾸어 왔을까.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 나는 개나리꽃이 한 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山蘭草(산난초) 뿌리 풀리는 조그만 시골에서 / 詩(시)나 쓰는 가난한 書生(서생)이 되어 살려 생각했다. / 고급 장교가 되어 있는 국민학교 동창과 / 개인 회사 중역이 되어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날 때 / 나는 혼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 樵夫(초부)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 눈 속에서 지난해 지워진 쓴냉이 잎새가 새로 돋고 / 물레방앗간 뒤쪽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 엽서나 기다리며 / 느린 하학종을 울리는 낙엽송 교정에서 / 잠처럼 조용한 풍금 소리를 듣는 2급 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 놀 속에 묻히는 봄 보리들의 침묵이 나를 무섭게 위협했을 때 / 관습의 신발 속에 맨발을 꽂으며 나는 / 눈에 익은 수많은 돌멩이들의 情分(정분)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 염소를 불러 모으는 鼻音(비음)의 말들과 / 부피가 작은 몇 권의 國定敎科書(국정교과서)를 거역했다. / 뒷산에 홀로 누운 祖父(조부)의 산소를 한 번만 바라보았고 /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었다. / 봄이 오면 아직도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 배달되지 않은 葉信(엽신)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
이기철의 <離鄕(이향)> 전문
시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고향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몇 해 하다가 대학으로 적을 옮겨 시 동아리를 지도해 주던 은사님의 시다.
같은 동아리에서 교직과목을 같이 이수하던 김 형이 곧잘 암송하곤 했었다.
'개나리꽃이 한 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 山蘭草(산난초) 뿌리 풀리는 조그만 시골에서 / 詩(시)나 쓰는 가난한 書生(서생)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는 구절에 감동받아 그 친구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는 교육청회의실에서 2004학년도 전교조 양산지회 <참교육실천보고대회>가 있었다.
다섯 분 발표를 보면서 '아! 참 선생님이구나.'했다.
그 중에서도 양산여중 최영이 선생님의 <희망의 나무를 키우며>를 들으면서 감동하여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학생과의 '대화 공책 쓰기', 월 1회 학생들과 함께 '봉사활동하기', '다함께 책읽기', 학생을 집으로 초청해서 학년 초인 4, 5월에 4-5명 씩 조를 짜서 '선생님과 함께 잠자리를', 학년을 마칠 때 '학급문집 만들기' 등, 그 중 어느 하나도 꾸준히 이어가며 하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최영이 선생님은 담임을 계속 맡으려 하며 맡는 동안은 계속해 오고 있다고 한다.
스무 해 전 교단에 첫발을 디딜 때의 초발심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도 내년에는 반드시 담임을 해야겠구나.' 해서 이번엔 담임 신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