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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역사속의 오늘] 1811년 12월 18일, 홍경래의 난이..
사회

[역사속의 오늘] 1811년 12월 18일,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12/18 00:00 수정 2004.12.18 00:00

 우리 역사에서 19세기는 가히 '농민봉기의 시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크고 작은 농민들의 저항이 끊이질 않았다. 18세기까지만 해도 개별적인 조세 납부 거부나 신역(身役ㆍ몸으로 치르는 노역)을 벗어나기 위한 도망 등이 저항의 전부였음에 반해, 19세기에 들어서는 저항의 형태가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저항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바로 1811년 12월 18일에 일어난 평안도 농민전쟁, 일명 '홍경래의 난'이다.
 19세기 초 조선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을 휘두르며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자연 그 폐해는 고스란히 민초들이 떠안아야 했으며, 따라서 민초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이때 평안도 용강 출신인 홍경래라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본디 양반 출신으로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당시 서북(평안도)인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대우로 번번이 낙방을 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사회 전반의 모순에 대해 눈을 뜨게 된 홍경래는 과거를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가 병법에 관해 공부하던 중 평안도 가산에서 서얼 출신인 우군칙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 1811년(순조11) 12월 18일 마침내 군사 2천여 명을 이끌고 떨쳐 일어났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가 아는 대로 이들의 봉기는 참담한 패패로 끝이 나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즉석에서 처형되었고, 지도자들은 전사하거나 서울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난 사회개혁운동이었지만, 조선 후기의 사회 발전을 바탕으로 지배체제의 외부에서 성장한 지식인들이 모순에 가득 찬 지배체제를 허물려는 시도를 하였고, 또 그 붕괴를 가속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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