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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문화초대석]극단 양산지킴이 대표 '조홍일'..
사회

[문화초대석]극단 양산지킴이 대표 '조홍일'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12/23 00:00 수정 2004.12.23 00:00
양산에 삶의 둥지 튼 육순 연극인

 연극의 불모지인 양산에 마침내 연극의 꽃이 피려나?
 급격한 산업화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자연경관도 점차 사라지고 대대로 이어져오던 예맥(藝脈)마저 끊기려던 양산에 요즈음 들어 서서히 문화예술의 기운이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시립예술단이 창단되고 올 한 해, 크고 작은 무대들이 열려 시민들의 문화향수욕을 채워주었다.
 금난새, 엄정행, 서혜경 등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다녀가고 음악, 국악, 무용분야의 지역 예술인들이 저마다의 예술혼을 분출한 한 해였다.
 뿐만 아니라 문학, 미술, 조각, 도예 분야에도 적잖은 인재들이 있어 나름대로 양산문화의 텃밭을 일구고 있다. 바야흐로 '문화도시 양산'을 향한 꿈틀거림이 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극의 밭은 여전히 척박하다. 전문극단은 물론, 아마추어 극단 하나 없는 실정이니 일러 무삼하랴.
 이런 척박한 땅에 육순의 한 연극인이 발을 들여 놓았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다보니 그곳이 양산이더라는 그는 누구인가?
 
 조홍일(64). 부산과 경남ㆍ북 일원에서는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이름이다.
 보통의 연극인들이 그렇듯 그도 꽤 신산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일본에서 자란 그는 해방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좀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한국말이 서툴러 학교에서 쪽발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점점 학교가기가 싫어진 그는 학교 밖을 서성이다 6.25를 맞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숫제 학교를 그만두었다.
 강의록으로 혼자 공부를 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어렵사리 야간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충무로의 영화판에 뛰어 들었다.
 남다른 신명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영화판은 그런대로 재미있고 신났다. 그 바닥 선배들을 부지런히 쫓아 다니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해 볼 양으로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그 무렵 5.16이 터지고 임화수가 휘어잡고 있던 영화판에 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면서, 그는 학교도 영화판도 중도하차해야 했다.
 그렇게 쫓기듯 부산으로 내려간 조홍일. 부산에서 그는 연극쟁이들을 만나고 영화판에서 못다 피운 열정을 연극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조홍일의 연극인생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부산의 전성환 씨나 허영길 씨가 동갑내기 친구들입니다. 전위무대와 레파토리시스템을 통해 부산연극의 역사를 만들어 온 친구들이죠. 이 친구들과 어울려 한 10여년 부산의 연극무대를 누볐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극만 해서는 딱 굶어죽기 십상이다. 부산 구서동에서 빵집을 하면서 부산생활에 꽤 쏠쏠한 맛을 들이고 있던 차에 교직에 있던 아내가 경북지방으로 전근을 가게 되어 아내를 따라 경주로 생활터전을 옮겼다.
 명색이 한 가정의 가장인 터에 돈 안 되는 연극에 매달려 아내가 벌어다 주는 수입에만 의존하고 있을 수가 없어 경주에서는 아예 연극판을 외면하고 빵집경영에만 힘을 썼다. 그런데 어찌 알았는지 경주의 에밀레극단에서 러브 콜이 왔다.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을 했지만, 이미 연극에 반 미쳐 있는 사람이 별 수 있으랴.
 못이긴 척 슬그머니 빠져들어 또 다시 시작한 연극인생.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에 미쳐버린 그는 에밀레극단을 시립극단으로 만들면서 애오라지 연극만을 위해 이녁의 열정을 다 소진했다. 그런 경주살이는 20년이나 됐단다.
 그때만 해도 작은 지방도시에서는 시립극단을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라 경주시립극단의 창단은 연극계의 화젯거리였다. 그 몇 해 전에 광주시립극단이 창단되었다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문을 닫았던 때라 경주시립극단은 지방 시립극단의 효시나 다름없었다.
 부산에서의 10년, 경주에서의 20년, 연극인 조홍일의 연극인생은 그렇듯 30년이 된 셈이다.
 
 "연극은 종합예술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연기자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리 좋은 작품이 있고 훌륭한 연출자가 있어도 좋은 연기자가 없으면 연극이 만들어 질 수 없지요."
 
 그래서 그가 양산에서 하고자 하는 일도 훌륭한 연기자를 양성하는 일. 그러나 연극적 인프라가 전혀 구축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쓸만한 연기자를 찾는 일도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양산에 오자마자 먼저 극단 창단부터 서둘러 극단 이름을 '양산지킴이'로 정한 그는 첫 작품으로 박조열 작 '토끼와 포수'를 올리기로 하고, 12월 16일로 공연날짜까지 잡아 놓았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어렵사리 연기진도 짜고 한창 연습에 열중할 즈음에 주연 여배우가 갑자기 아파 들어 눕는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 양산에서의 첫 시련을 훌훌 털고 다시 몸을 추스르고 있다.
 각 학교에 공문을 발송, 협조를 요청한 그는 우선 교사들을 중심으로 배우들을 모집할 요량이다. 물론 교사가 아닌 일반시민에게도 언제든지 문호는 개방돼 있다.
 이번에 다시 선택한 작품은 김용락 작 '방자놀이'.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며 맛깔스런 대사, 재기 넘치는 풍자가 여간 재미있지 않은 작품이란다.
 
 이번에는 제발 아무 동티 없이 순조롭게 작업이 이루어져 머잖은 날에 양산에 있는 양산극단의 이름으로 비로소 연극 한 편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보았으면 싶다.
 경주에서 그렇게 했듯 양산에서도 '극단 양산지킴이'를 주축으로 반드시 시립극단을 만들어 놓겠다는 그의 꿈이 실현되는 날은 언제쯤이 될까?
 그것은 어쩌면 양산시민들이 양산에서의 이 연극운동에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또 어느 정도의 열정을 기울여 주느냐에 달려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극단 양산지킴이에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연기자가 확보돼 제대로 된 극단으로서의 체계가 갖추어지면 저는 유능한 젊은이들에게 극단을 맡기고 뒤로 물러날 생각입니다. 그때가 이르기 까지는 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울 생각입니다."
 
 1988년과 91년, 95년 등 세 차례에 걸쳐 경주예총 공로패를 받았고 96년 제7회 경북연극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는 그동안 이만희 작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마르코 까불레티의 '보잉보잉' 등 2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연락처-
 극단 (055) 372-1476, 휴대전화 010-3113-1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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