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은 도토리 떫은맛 빼려고 오랜 시간 물에 불리고 우려내어 만든다. 하지만 도토리묵은 도토리묵만의 쫄깃쫄깃한 맛 가운데 배어 있는 떫은맛으로 먹는다. 고들빼기김치도 단맛이 아닌 쓴맛으로 먹는다. 떫은맛, 쓴맛이 더 깊은 맛을 내기도 하는 것이다.
모자라는 삶보다는 넉넉한 삶이 좋고 풍요로운 삶이 좋다. 실패와 좌절하는 삶보다는 승승장구 성공하는 삶이 좋다. 그런데 곰곰 곱씹어 보는 추억 속의 것들을 살펴보면 달콤했던 삶보다 쓰고 떫었던 삶들이다.
시집간 동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 오라버니 이제는 가세가 조금은 일어서 / 가끔 산에도 올라간답니다 / 작년 눈 구경 갔다가 팔이 부러졌어요 /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 놀다가 부러질 팔도 있다 생각하니 / 그저 꿈만 같아서 / 실실 웃음이 다 나옵디다 / 그건 그렇고 오라버니 / 팔이 뼛속까지 가려운 걸 보니 / 이제 깁스를 풀 때가 다 되어 가는 모양이네요 / 그때면 홍어가 제법 삭혀져서 먹을 만할 거네요 / …… // 이제 밥걱정은 없으니 한 번 다녀가라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 코가 맵다 / 눈이 맵다 / 입 줄인다고 / 열 네 살 나던 그 해 남의 집에 던져졌던 동생의 편지는
원무현의 <홍어(洪魚)> 전문
40년, 30년 저쪽에는 입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핏줄을 남의 집에 던져버려야 했던 집들이 있었다. 세월의 강물 속에서 이제 그 아픔은 다 삭혀졌을 것 같았는데 팔 부러진 것 걱정하지 말라는 동생 편지가 잘 삭은 홍어처럼 눈과 코를 맵도록 쏘아댄다.
나방 되어 날아가네 유년이 잠자는 고치 속으로 // 뽕밭에 있어야 할 장남 / 앞산 묘 머리 빨개지도록 공놀이에 해 지는 줄 몰라 / 누에 빈 속 들여다보던 아버지 작대기 들고 쫓아오네 / 자전거튜버처럼 탱탱한 원주 원씨 관란공파 십 사대 손 종아리 / 쪽 물 먹인 명주실 같은 논두렁 밭두렁을 날래기도 하지 / 따라올라믄 와보소 맨날 술만 묵고 어매만 구박하는 새끼…… / 일몰 아래 성난 황소와 청솔모가 쫓고 쫓기네 / 졸졸 따라다니다 허기진 개울에 달걀노른자 같은 달이 비치면 / 뱃가죽이 등짝으로 몰려가고 제기랄 / 아아 입 벌리면 금방이라도 쏟아져 들어올 것 같은 / 저기 별들은 왜 하필이면 밥알로 뜬다냐 // 마지막 잠 오령에 들기 전 / 최후의 만찬을 나누며 줄기차게 뽑아내는 / 알 수 없는 누에의 경전에 범람을 일삼던 분노가 친친 감길 때 / 잠들지 못하던 실눈 속에 아버지, / 누에를 돌보듯 이불 매무시하며 떠 있네 / 눈물이란 녀석 그렁그렁 / 누에처럼 기어다니는 밤 깊어가네
원무현의 <아름다운 변태> 전문
저물녘 해가 미루나무에 걸터앉아 햇살을 헹굽니다 / 어릴 적 물고기가 빠져나간 손가락 사이로 노을, / 노을이 올올이 풀려서 떠내려갑니다 / 누런 광목 천 하나로 사철을 건너신 어머니 / 어머니께 꼭 끊어드리고 싶었던 / 비단 폭 같은 냇물을 움켜쥡니다 / 이제는 밥 짓는 연기 나지 않는 텅 빈 굴뚝을 / 우렁우렁 넘어오는 부엉이 울음이 맵습니다
원무현의 <저녁 무렵> 전문
원무현의 시집 <洪魚(홍어)>를 읽어보면 찢어지는 가난으로 인한 아픔과 부끄러움이 오랜 시간의 물살 속에 우려지고 삭혀져서 이제 잘 익은 고들빼기김치의 쓴맛과 꼬들꼬들 잘 굳은 도토리묵 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