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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저항의 역사를 지닌 강화도를 가다..
사회

저항의 역사를 지닌 강화도를 가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2/04 00:00 수정 2005.02.04 00:00
전교조 양산지회 교육기행을 다녀와서 - 김법준 개운중 교사

#1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의 출발
 아직 사위가 깜깜한 새벽 5시, 웅상에서 차를 타고 양산으로 향했다. 방학이라 여유 있는 아침이었는데 새삼 일찍 일어난 몸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양산 공설운동장에 반가운 얼굴들이 한 명씩 두 명씩 나타나면서 마침내 가슴 설레는 강화도 교육기행이 시작되었다.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버스는 남한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향하는 긴 여정의 시동을 걸었다. 어슴푸레할 무렵에 출발한 버스는 정오가 훌쩍 지나서야 강화도에 도착하였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이는 전교조 강화도 전 지회장 김순래 선생님이셨다.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김 선생님은, 이후 마지막까지 우리 여정을 책임져 준 강화도를 사무치게 사랑하는 분이셨다.
 이번 여행에서 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는 그 고장 음식을 맛 볼 수 있었다는 것인데, 강화도만의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도 김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였다.
 강화도의 맛인 밴댕이 순무김치를 먹으며 깍두기 맛이 특이하다 했었는데 그것이 배추뿌리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배추뿌리로 깍두기를 담은 사람들이 우리 아픈 역사의 한 면을 지탱하며 저항했던 것이다.
 점심을 먹은 후 강화도 역사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고인돌로 대표되는 고조선시대의 문화, 대몽항쟁기의 39년의 고려의 수도, 몽고에 끝까지 저항했던 삼별초, 병자호란 때 후금에게 침입 당해 패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막지 못한 계기가 된 터, 세도정치에 가족의 대부분을 잃고 글 배우기를 포기한 강화도령 철종,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대표되는 서양과의 전쟁, 현재도 분단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민통선 등 순탄한 지역에서는 한 번도 접하기 힘든 굴곡의 세월을 강화인들은 용케도 버티며 살아왔다.

#2 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
 박물관에서 나온 일행은 논에 물을 대어 만든 썰매장을 바라보며 광성보로 향했다. 광성보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다.
 그 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초지진ㆍ덕진진ㆍ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다. 어재연 장군과 이름 없는 60여명 용사들의 무덤은 7개의 봉분으로 남아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신미양요는 미군에게 물리적으로 패한 전쟁이지만 같은 장소에서 병인양요(1866년)는 양현수 장군이 이끄는 600여 포수들이 프랑스군을 강화성에서 몰아낸 전투였다. 물러날 때 우리의 고서들과 문화재, 황금 등을 프랑스군이 약탈해 감으로써 종국에는 우리의 문화를 유럽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다.

#3 마리학교의 대안교육 - '스스로 살리고, 서로 살리고, 세상을 살리세'
 다음 찾아간 곳은 마리학교. 마리학교는 '밝은 사람'을 인간상으로 '스스로 살리고, 서로 살리고, 세상을 살리세'를 교육목표로 삼은 2004년에 개교한 대안학교다. 폐교를 빌려 만든 학교는 아담한 크기에 운동장 이곳저곳에 잔디를 깔아 놓고, 이제 막 개교한 학교답게 아직도 뭔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마리학교를 견학한 후 서해 낙조를 보기 위해 분오리 돈대로 출발하였다. 강화도에는 5진(鎭) 7보(堡) 53돈대(墩臺)가 있다. 이것 모두가 군사방위시설인데, 이 중 돈대는 1679년(숙종 5년)에 설치되었으며, 그 형태는 돌을 쌓아 곳곳에 총구멍을 설치하고 위에는 낮은 성을 쌓아서 평평한 모습이다. 이 중 분오리 돈대는 서해 낙조의 아름다움을 한눈으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이날은 운무가 조금 끼어 있었지만 낙조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분오리 돈대에서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두부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기행에 참여한 인원은 30여명. 이 중 아이들이 4명인데 중학생이 2명, 초등학교 1학년 1명, 그리고 문제의 여섯 살 주형이가 있었다. 잠자다 끌려나와(?) 눈을 떠보니 고속도로였으니 주형이의 난감함이 어땠을 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다.
 이때부터 주형이를 달래고 어르기 위한 아빠와 삼촌들, 이모들의 수고는 실로 말로 설명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데 유독 이 식당 예쁜 누나의 말은 잘 들어서 이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은 우리 모두 편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정이 끝날 때까지 식당 누나를 제외하고는 어떤 미모의 이모도 주형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마을회관에서 성국모 마리학교 선생님으로부터 학교의 설립 배경과 학교 운영의 목표, 그리고 구체적인 학교 운영에 관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성국모 선생님은 인천에서 교사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강화도에 들어와 마리학교를 설립하였다. 2004학년도에 30명이 중학교 1학년에 처음으로 입학한 학교로 한 학기에 일반 정규 교과 30학점 외에 방과 후 특별활동에 5학점을 인정하는 교육과정을 편성 운영하고 있다.
 교육과정은 생활예절교육, 모둠별/개인별/주제별 프로젝트 수업, 노작교육이 특징을 이루고 있다. 학생들에게 조금의 땅을 주어 밭작물을 기를 수 있도록 하였고, 올해 3000평의 논에서 50여 가마니의 쌀을 학생들과 수확하였다는 말은 새삼 노동의 값진 의미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학교 설립 초기에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몇몇 학생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아픔을 겪었던 사례와 바른 교육을 이루기 위해 철학을 살리는 교육을 하겠다는 말로 강의는 끝을 맺었다.

#4 민통선 관측소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다
둘째 날 아침에는 숙소를 출발하여 석모도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보문사는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해 있는 기도로 유명한 사찰로 다리품을 많이 팔아야 올라 갈 수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자연석굴로 어부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린 불상을 봉안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사찰이다. 절 뒤편에 419개 돌계단을 올라가면 사람의 눈썹을 닮은 눈썹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곳에 석불을 새겨 두었다.
 석모도를 빠져나오는 선착장에는 한 무리의 갈매기 떼들이 모여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녀석들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얻어먹기 위해 배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갈매기들은 배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가 배가 출발하기가 무섭게 떠나가는 배를 따라오며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무리를 지은 갈매기 떼가 날아오는 과자를 잽싸게 받아먹는 광경은 하나의 장관이었다. 강화도에는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고루 분포한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북방식 지석묘인 고인돌은 그 덮개돌의 무게가 80톤에 달한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강화도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80톤의 돌을 나를 수 있는 부족을 이끄는 부족장이 존재하는 계급사회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강화도에 민통선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버스로 조금 이동하니 민간인 통제구역이 나타났다. 초병에게 방문 목적을 알리고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OP(Observation Postㆍ관측소)에 올랐을 때 담당 소대장이 나와 안내를 해 주었다. 북한의 농촌지역이 너무나 잘 보이는 곳이었는데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수로의 조금 위에 예성강 물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화읍에는 39년 고려 수도가 되었던 고려궁지와 삼일운동 기념탑과 철종이 자신이 왕이 되어 탈 어가행렬이 오는 것을 사약이 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마루 밑에 숨었다는 용흥궁이 있었다. 용흥궁 아래에는 특이한 형태의 한옥이 한 채 있었다. 1900년도에 건축된 가로 10칸, 세로 4칸의 성공회 성당으로, 이 성당의 외형은 한옥 모양이며 안쪽은 서양의 교회를 그대로 본떠서 만든 건물이다. 성공회 십자가 문양 밖에 태극문양을 그린 것과 건물외형이 불교사찰과 유사한 점은 그 당시 강화인과 친해지려는 힘든 노력으로 보였다.
 둘째 날 저녁은 이시우 선생님으로부터 평화이야기를 들었다. 강화에서 대인지뢰와 비무장지대에 대한 사진 활동을 하는 사진작가인 이 선생은 "한반도의 분단이 제국주의의 이익다툼에서 비롯되었고 앞으로도 이 분단 체제를 유지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상존하고 있다"며 비분강개했다. 우리 일을 우리가 결정하지 못한 아쉬움이 앞으로도 지속될 문제로 남아 있다는 현실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려조 최씨 무신정권기의 문필가 이규보의 묘를 답사하는 것으로 강화도의 교육기행은 끝이 났다. 저항의 역사를 간직한 강화에서 마음 따뜻한 분들과의 교육기행은 우리 참가자들의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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