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2월 10일 오후 3시경, 일단의 군인들이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ㆍ중유리ㆍ와룡리 3개 마을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지리산 자락의 거창, 산청, 함양 일대에 출몰하는 공비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들어온 공비토벌 전담 부대인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소속 8백여 명의 군인들 이었다
연대장 오익균 대령과 대대장 한동석 소령의 작전 지시에 따라 광기의 빨갱이 사냥에 들어간 군인들은 마치 폭도들처럼 날뛰며 집에 불을 지르고 양민들을 밖으로 내몰아 신원초등학교에 가두었다. 영문을 모르고 끌려온 사람들은 젖먹이 아이에서부터 구십 노인까지 수백 명이었다.
침략군도 아니요 점령군도 아닌 대한민국의 국군이, 이민족도 아니고 적군도 아닌 제 나라의 어진백성들에게 마구잡이로 총질을 한 이른바 거창양민학살사건-
그들은 2월 10일에 내탄부락 골짜기에서 청장년 136명을, 11일에는 박산계곡에서 다시 527명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51년 2월의 공포는 거창뿐이 아니었다.
2월 8일부터 11일까지 사흘에 걸친 11사단의 만행은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거창군 신원면으로 이어져 당시 산악 1백리 범위 안에 있는 이 지역에서 1천 5백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가공할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나라, 이 땅에서 포악한 권력이 저지른 온갖 만행과 패악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60년 4월에서 80년 5월의 광주에 이어지기까지, 이 땅의 민주화제단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영령들이 아직도 구천을 헤매고 있나니…, 그러기에 과거사규명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