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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시가 있는 마을]향(香)을 묻다..
사회

[시가 있는 마을]향(香)을 묻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2/04 00:00 수정 2005.02.04 00:00

 강화도는 양산에서 차로 갈 수 있는 곳 중 가장 먼 곳이다. 지난주에는 전교조 양산지회 교육기행에 편승하여 작은놈과 조카를 데리고 그 먼 강화도를 다녀왔다.
 강화대교를 건너 점심으로 메기매운탕을 먹고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의 역사 현장인 광성보를 둘러보고 폐교된 초지분교를 임대해서 세웠다는 대안학교인 마리학교를 찾았다. 마리학교의 '마리'는 '靈鷲山(영취산)'을 '영축산'이라 부르는 것처럼 마리산(마니산)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이 학교는 '생명이 곧 하늘'이라는 교육이념과 추구하는 인간상을 '밝은 사람'으로 하여 세운 작은 대안학교다. 이제 2학년으로 올라가는 18명의 학생과 전담교사 6명, 그리고 스물이 좀 넘는 지원교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제 신입생을 받으면 학생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난다. 교육목표는 '스스로 살리고, 서로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것이라며 생활한복과 꽁지머리가 어울리는 '농사' 선생님이 학교 소개를 한다.
 농사 선생님을 따라 교실을 둘러보는 중 교실 칠판 위에 걸려 있는 '강화매향제' 제문이 눈에 확 들어왔다.
 
 우리는 / 대자연 천지의 노동을 / 인간이 질곡 시키고 / 착취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 인간의 삶과 / 인간의 노동과 / 하늘의 노동이 / 함께 하는 / 그런 따뜻하고 향기로운 세상이 / 영원한 현재가 되길 바라며 / 이 향을 묻는다. // 언젠가 그 세상이 오고 / 이 향을 후세의 또 다른 내가 / 보기를 바란다. // 아울러 이 향기는 / 지금부터 불멸의 시간을 통해서 / 인종, 국가, 계급, 성별의 이름으로 / 인류가 하나 되는 향기이기에 / 우리의 짧은 삶을 / 죽음의 잔치에 / 허덕이게 하는 / 그 무의미함도 / 이 자리에 / 묻어 버리고자 한다.
 강화 마리학교 교실에 있는 <매향문(埋香文) designtimesp=3665> 전문
 
 '매향제'는 원래 고대로부터 내려온 비밀결사의식이며 '저주'를 풀어내는 풀이굿으로 이어왔다. 저주에 걸려 죽임의 길로 들어선 현대 문명을 살림의 길로 바꾸어 내려는 결사적 소망으로 읽힌다. 전에 썼던 글이 생각난다.
 
 세상의 모든 길은 옳은 길과 그른 길로 단순하게 나눌 수 있다. 옳은 길이 살려내는 길이라면 그른 길은 죽이는 길이다. 생명 있는 것들은 어느 것이나 죽음을 싫어하고 삶을 좋아한다. 모든 생령들은 살고 싶어 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옳은 길을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세상의 이치는 어느 것이나 다 옳은 길과 이어져 있다. 사람도 천지에 가득한 생령 중 하나다. 당연히 옳은 길, 삶을 살려내는 길을 가고자 한다.
 사람은 원래 약한 생령이었다. 하지만 후회할 줄 아는 유일한 존재였다. 약하기 때문에 늘 위험했고 위험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뉘우칠 줄 알았다. 사람은 이런 뉘우침을 통해 경험을 하고 경험을 엮어 지식을 낳았다. 작은 지식이 큰 지식으로 자라고 큰 지식은 큰 힘이 되어 마침내 나약한 존재인 인간은 그 나약함과 뉘우침으로 해서 다른 존재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인간이 다른 모든 생령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해서 사람의 본질적인 나약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큰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개체로서의 사람은 여전히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나약한 존재인 사람이 살림의 길, 바른 길을 따르지 않고 군림만 하려 든다. 다른 모든 생령들을 밟고 서서 스스로의 삶의 길만 추구하여 다른 생령들의 삶은 돌아보지 않게 된 것이다. 다른 생령들을 밟고 군림하기 위해 무수한 생명들을 죽이는 그릇된 길, 죽임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 아닌 다른 모든 생령들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끊임없는 밟음과 밟힘의 반복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속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다. 살림이 죽임에 닿는다 하더라도 그 죽임이 다른 살림에 닿게 되는 돌아올 수 있는 길을 간다. 하지만 유독 인간만은 다른 생령들에 비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새로운 삶의 탄생을 위해 헐고 불필요한 것을 파괴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삶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만은 먹을 것도 아니면서 생령들을 죽이고 필요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파괴한다. 파괴를 위한 파괴, 죽임을 위한 죽임의 길로 가는 것은 마치 아귀처럼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는 욕망만 남을 뿐이다. 인간은 이런 아귀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생령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이 세상엔 아귀만 가득 찬 세상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지옥이 될 것이다.
 천성산 고속철 관통 문제 역시 이런 관점에서 풀어야 할 것이다. 세상엔 아직 희망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순결한 마음의 지율 스님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과 노동이 하늘의 노동과 함께하는 그런 따뜻하고 향기로운 세상이 영원히 현재가 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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