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724년전인 281년 9월 신라의 제 13대 왕이자 김씨왕조의 문을 연 미추왕이 ‘양산’에 왔다.
미추왕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신라 김씨 왕조를 연 인물이자 백성들로부터 성군으로 추앙받던 왕이다. 그러한 왕이 양산을 방문했으니 당시 양산 사람들 오죽이나 좋아했겠는가.
미추왕이 양산을 방문한 이유는 군대 사열을 위해서였다. 당시 신라는 백제의 계속되는 침입에 직면해 있었다.
274년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다 신라의 방어벽에 막혀 물러나더니 4년 뒤인 278년에도 또 침입해 신라의 전초 기지인 괴곡성을 포위했다.
백제의 침입을 철저한 방어로 물리치기는 했으나 미추왕으로서는 계속되는 백제의 침입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대적인 군대 사열을 하기로 한 것이다. 군대 사열을 통해 신라군의 위용을 과시해 백제의 침입 의도를 사전에 봉쇄할 목적이었다.
미추왕은 당시 꽤 인기 좋은(?) 왕이었기에 양산의 민초들은 아마도 왕을 열렬히 환영했을 것이다.
미추왕은 당시 지방귀족과 관아에서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는 일이 잦자 이를 해결키 위해 ‘농사에 해가 되는 일을 모두 없애라’는 특명을 내려 백성들이 고된 부역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만큼 백성들을 아꼈던 왕이다. 미추왕의 이 같은 신념은 궁궐 신축 논란에서 들어난다. 276년 신하들이 앞장서서 궁궐을 신축해야 한다고 청했지만 미추왕은 백성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중대한 사항이라며 한마디로 거절한 것이다.
미추왕의 인기비결은 이렇듯 철저하게 백성들 중심으로 생각하고 정책을 집행해 나가는 것이었다.
미추왕이 백성들로부터 얼마나 신뢰를 받았는지는 설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미추왕 사후 왕인 유례왕 시절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에 쳐들어와 위급한 순간 대 잎사귀를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와 신라군과 함께 힘을 합쳐 이서국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적군을 패퇴시킨 후 도와주었던 군사들은 돌연 사라졌는데 대 잎사귀들이 미추왕 능 앞에 쌓여 있어 모두들 미추왕의 음덕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위의 내용은 설화이고 당시 신라를 도와준 것으로 생각되는 군사들은 백제군으로 보이지만 죽은 미추왕이 도와주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백성들의 미추왕에 대한 믿음은 강했던 것이다.
또 다른 설화도 있다. 삼국통일의 일등 공신인 김유신의 혼백이 신라를 떠나려 할 때 미추왕이 이를 만류하며 신라에 머물며 나라를 지키기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김유신과 미추왕을 미화하기 위해 후대에서 만들어낸 이야기 일 것이다. 그러나 미추왕에 관한 설화 대부분이 이와 같이 국가의 안위에 관계된 점으로 미루어 당시 사람들의 미추왕에 대한 믿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인기왕(?) 미추왕은 양산에서 군대 사열식을 가진 후 3년 뒤 숨을 거둔다. 군대 사열 이후에도 백제의 침입이 계속돼 백성들이 고통 받자 노구의 몸을 이끌고 변경을 들러 백성들과 군졸들을 격려했던 것이 건강을 악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죽는 순간까지 미추왕은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활동한 것이다. 이런 왕이었으니 신뢰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