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3월, 양산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서울의 3ㆍ1운동 소식은 양산에도 시시각각 흘러들어왔다. 중부동에 살고 있던 엄주태(당시 20세)는 3월 12일 만세운동의 분위기도 알아볼 겸 혼자서 부산으로 갔다.그는 부산 일원을 돌아본 후, 동래읍에 있는 친척집으로 가서 1박 하였다. 다음날인 13일에는 마침 동래고보 학생들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벌이고 있었다.엄주태는 그 대열 속 주동인물의 한 사람인 엄진영(친척)의 열렬한 거사를 목격한 뒤 의분에 넘쳐 군중과 함께 시위에 가담하였으며, 학생들이 뿌린 '독립선언서'와 공약서ㆍ경고문 등을 주워 품속 깊이 감춘 채 집으로 돌아왔다.14일, 양산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동지 전병건을 만나 어제 동래의 만세 분위기를 들려주고 품속에 간직했던 독립선언서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곧장 양산의 의거를 의논, 그 자리에서 거사 결행에 동참하겠다는 전병건의 동의를 얻어냈다.15일, 엄ㆍ전 두 사람은 엄주태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5매를 등사하여 휴대하고 중부동의 박삼도, 이귀수를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양산에서도 만세 시위를 하자고 제의하였다.박삼도 등은 그 자리에서 찬성하였다. 두 사람은 동지들의 호응에 힘입어 구체적 거사일을 3월 27일(음 2월26일 양산장날) 정오, 장터로 결정하고 진행방법 등을 논의하였다.25일에는 준비사항을 총 점검하고 미진한 부분을 서둘러 보완하였다. 엄주태, 전병건, 박삼도, 정주봉, 이귀수 등은 거사 당일 배포할 독립선언서를 대량 등사하기 위하여 오후 5시 무렵 양산군청 사환인 정주봉으로 하여금 양산군청의 등사판을 엄주태의 집으로 몰래 가져오게 한 후 독립선언서 200매와 공약서ㆍ경고문 등을 등사 제작하고 '대한독립만세'라는 큰 깃발도 만드는 등 시위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예정된 3월 27일 주모자 5명은 준비물을 은밀히 휴대하고 장터로 잠입하였다. 이날따라 각처에서 많은 장꾼이 모여 들었다.사전에 연락되어 있던 강재호, 안덕원, 전병한 등도 장꾼과 함께 모여들었다. 예정된 12시에서 1시간을 기다리자 동래, 기장, 언양 등지에서 장꾼 등 3천여 명이 모여들어 장터를 가득 메웠다.이때를 놓칠세라 주동자 5명은 장터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준비한 독립선언서 등을 군중들에게 배포하면서 '대한독립만세'란 깃발을 높이 쳐드는 순간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때 군중 속에 끼어 있던 강재호, 안덕원, 전병한 등도 연달아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자 장터의 장꾼 3천여 명도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삽시간에 장터는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변하고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주동자들은 여세를 몰아 군청을 향해 시가행진에 들어갔다.이에 화들짝 놀란 양산헌병분견소의 헌병과 순사들은 총검으로 시위 군중을 저지하고 차단하였으나 용감한 청년시위대는 질서정연하게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일본헌병과 경찰이 엄주태, 전병건, 박삼도, 정주봉, 안덕원, 강재호를 체포해 가자 분노한 군중은 양산헌병분견소와 양산군청으로 진격하여 정문에서 대치하면서 구인한 청년들을 석방하라고 외쳤다.성난 군중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옷을 벗어들고 "우리 전부를 구속하라"고 외쳤다. 이때 주변 마을의 주민들도 농악을 울리면서 사방에서 몰려들었다.사태가 더욱 다급해져 수습할 수 없게 되자 양산헌병분견소에서는 부산헌병분대로 지원을 요청하였고 부산의 헌병분대 오장(伍長)과 그의 부하 12명의 완전무장 병력이 도착했다.양산헌병분견소 대장 오카다(岡田)는 실탄발사를 중지시키고 구인된 청년들을 일단 석방하였지만, 이튿날 새벽 잠자고 있던 엄주태, 전병건, 박삼도, 정주봉, 강재호, 안덕원, 전병한 등을 재차 구인하여 부산헌병분대로 이관한 후 부산감옥에 수감시킴으로써, 4월 1일 오후 2시 약 2천 명의 군중들이 다시 떨쳐 일어나게 했다. <자료출처 : 양산항일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