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불을 지핀 기미년 3월..
사회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불을 지핀 기미년 3월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2/18 00:00 수정 2005.02.18 00:00

3.1운동은 일제가 이 나라를 강점하고 있던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거의 1년간이나 계속된 조선인의 항일민족독립운동을 가리킨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에서 밝힌바와 같이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개하였지만, 일제는 무도하게 총검으로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여 수많은 조선인 사상자를 냈고 교회, 학교, 민가 등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3·1운동은 흔히 민족자결주의나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보다는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자연발생적인 민족운동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면 3·1운동을 이끈 주체는 누구인가? 이 점과 관련해서는 민족 대표 33인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본래 독립선언식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민족 대표들 일부가 불참한 가운데 서울 인사동의 요리집 태화관에 모여 미리 그들끼리만 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최린은 태화관 주인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신고 전화를 걸게 하고,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만 듣고 만세 삼창을 제창한 다음 스스로 일경에 체포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민초들은 계층과 이념을 떠나 하나가 되어 떨쳐 일어섰으니 3ㆍ1운동의 주체는 당연히 이 땅의 민초들이다.

따라서 기미년 3월에 일어난 이 민족의 항거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이후 조선독립을 위한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중국ㆍ인도 등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도 크나 큰 영향을 미쳤다.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