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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시가 있는 마을]감포 가는 길..
사회

[시가 있는 마을]감포 가는 길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2/18 00:00 수정 2005.02.18 00:00

"요즘 다 별 일 없는가?"
"새삼 또 무슨 인산데?"
"그냥 별 일 없는가 물었네."
"하하, 나도 그냥 되물어 본 말이네. 안부는 포석정 주차장에서 만나 다 나누었잖은가."

대학에서 백전(白戰)동인으로 만나 스무 해 넘게 그 만남의 끈을 이어오는 유형이 앞뒤 없이 묻는 인사말에 최형이 받아 말한다.

불국사 지나 석굴암 오르는 굽이 잦은 길섶에 잔설이 쌓여 있다. 김형 알음으로 차는 오늘 밤을 보낼 경주 내남 용은사에 두고 모두 연료비 적게 드는 내 LPG차로 감포 횟집에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이다.

"난 새벽에 일어나는 횟수도 많이 줄었고 예쁜 여자를 봐도 정말 그야말로 꽃일 뿐이네."
"예쁜 여자가 그냥, 꽃이 아니면 또 뭐였는데?"
"그냥 자연스런 일이지 뭐. 좀 빠르고 늦을 뿐이지 모두 줄어들다가 끊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편하게 받아들이게."

"머리에 세월의 무게가 소금으로 쌓이면서부터는 사랑이 꼭 들어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그냥 손만 잡고 자도 되고. 손 안 잡으면 또 어떤가. 그냥 바라만 봐도 되는 일이지."
"허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차는 멀리 치술령을 보며 토함산 등성이를 타고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몇 굽이인가 급한 내리막길을 돌아내려가자 어느 순간 길섶의 잔설이 사라졌다.

"김지하 시에서든가. 회음에 힘이 풀리고 나서야 세상 살아가는 근원이 그 힘인 것을 알았다는 뭐 그런 말이 떠오르네. 이런 편안함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타는 듯한 아픔이라도 뜨거움이 삶의 의미가 아닐까?"

횟집을 잡아 놓고 감포 방파제에 올라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해 기운 하늘과 하늘보다 더 짙은 바다가 서로 닮아가며 붙어 있다.
 
누군가에게 받은 그릇 하나를 작업실 창가에 올려놓았다. 
가만히 보니 참 쓸모없는 그릇이다.
모양은 막사발과 비슷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너무 얕고 얇아서 무언가를 채우기엔 어울리지도 않고 쓸모도 없는 듯하다.
저 그릇을 빚은 이는 무슨 생각으로…….
바람이 분다. 그런데 문득, 
창가에 올려놓은 그 쓸모없는 그릇에 바람 한줌이 담긴다.
알 수 없는 울림이다.

김향금의 <사유 한 그릇 - 바람 한줌2> 전문
 
누군가에게 받은 그릇 하나, 쓸모가 없다. 작업실 창가에 두었다. 두고 곰곰 봐도 어울릴 쓸모가 없다. 쓸모없는 그릇 하나. 그래도 한 번 더 본다. 저 그릇을 빚은 이는 무슨 생각으로 빚었을까.

바람이 분다. 문득, 쓸모없는 그릇에 바람 한줌이 담긴다. '알 수 없는 울림'으로 한참을 그냥 그 울림 속에 서 있는 화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시라 하기에는 덜 다듬어진 글이고 그냥 아포리즘(aphorism)이라기에는 길이가 좀 길다. 생활의 단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글인데 글의 길이보다 그 울림이 길다.

등 뒤 서산으로 기울어진 햇살이 바다 위 푸른 하늘에도, 푸르고 잔잔한 바닷물에도 반투명한 엷은 은막을 입힌다. 순은(純銀)의 바다가 된다.

내 지천명은 저런 순은의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내는데 갈매기 떼와 외따로 떨어져 있던 바다 오리 한 마리가 순은의 바다를 겹겹의 쐐기무늬로 가르며 내게로 다가온다. 그 모습이 눈부시다.

학철 / 시인ㆍ보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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