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게 되더라도, 나무가 되기 전까지는, 결국 고독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성(儒城)에서 조치원(鳥致院)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수도승(修道僧)일까, 묵중(默重)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公州)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過客)주) 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溫陽)으로 우회(迂廻)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把守兵)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重)한 그들의, 침울(沈鬱)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박목월, <나무> 전편 -
수도승처럼 묵중하게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의 침울과 고독.
평생을 수도하여도 벗어날 길 없는 침울과 고독.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는 침울과 고독이 삶의 본질이라면, 그 뿌리를 더 단단히 키워 제 각각의 빛나는 잎과 눈부신 꽃을 피워야 하는 것 또한 인생의 본질이 아닌가?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고, 시와 아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고 돌아왔다.
초저녁잠에 들 준비를 하는 한 그루 경건한 나무의 모습이 떠오른다.
배정희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