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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마파람의 행복 나누기]최명희 대하예술소설 <혼불>을 읽..
사회

[마파람의 행복 나누기]최명희 대하예술소설 <혼불>을 읽고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3/03 00:00 수정 2005.03.03 00:00
"너희는 이 민족의 '혼불'을 붙들고 지켜야 할 마지막 세대"

아들아!
아버지는 오늘, 아버지가 이 겨울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읽었던 한 소설의 독후감을 네게 들려주려 한다. 이렇게 말하면 너는 얼른 알아차리리라.
 
"아, 그 '혼불' 말씀이죠?"
그래, '혼불'말이다. 네가 방학 때 집에 내려와 아버지가 전 1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 탐독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자못 신기해했었지.

마침내, 엊그제 이 소설의 제 10권 마지막 장을 넘겼다만, 그냥 건성건성 넘기지 않고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어가며 꼼꼼히 읽느라고 아버지는 한 겨울, 거의 한달 간을 '혼불'에 혼을 빼앗겼다. 하기야 이만한 격조의 작품을 속독으로 후딱 읽어 넘길 수야 없는 일이지.

격조, 그렇다. '혼불'은 한마디로 매우 격조 높은 소설이었다. 그러기에 이 소설을 일러 예술소설이라 했던가.
 
그것이 문학이든 그림이든 아니면 음악이든 감히 예술이란 이름으로 발표되는 작품들이 수없이도 많다만 실로 예술이라 값하기에 마땅한 작품이 어디 그리 흔하더냐.

그런 점에서 '혼불'은 쉽게 써져서 쉽게 읽혀지는 여느 소설들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되는 소설이다. 과연 예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소설이라 하겠구나.

이제 이 다음, 네가 다시 집에 오게 되거든 다른 일은 다 제쳐두더라도 부디 이 '혼불'은 일독, 아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재독, 삼독해 보기를 바란다.

내가 네게 우정, 다른 일에 앞서 먼저 이 '혼불'을 읽어보기를 권하는 까닭은 미술학도로서 문학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네가 앞으로 혹 글을 쓰게 될 때, 이 '혼불'이 네 글쓰기의 좋은 본보기가 되려니 싶어서이다.
 
1930년대에서 1943년 봄까지의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혼불'은 전라도 남원지방의 한 종가(宗家)를 지키는 며느리 3대의 신산(辛酸)스러운 삶의 굴곡을 기둥 줄거리로 고난의 시대를 살아간 우리 겨레붙이들의 올곧은 정신세계를 그리고 있다.

종가의 종부(宗婦) 3대. 즉 청암부인과 그네의 며느리 율촌댁, 손부 효원을 중심인물로 하여, 그들을 둘러싼 강모(종손) 이기채(강모의 부친) 강호, 강태(강모의 사촌형) 등의 남정네와 강모의 사촌누이 강실이, 그리고 옹구네, 춘복이, 백단이, 쇄여울네 등의 상민들과 종가의 그늘에 기식(寄食)하는 노비들을 비롯한 그 밖의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타고난 반상(班常)의 차이에 따라 제각기 삶의 모습을 달리 하고는 있지만, 그들 모두가 이 민족 아픈 역사의 중심축이라는 점에서는 하나같이 가련하고 애처로운 인물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애잔한 눈길로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어루만짐으로써 자칫, 어둡고 칙칙하게 그려질 소설을 문학 본래의 예술성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혼불' 어디에도 여인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덧씌우고 있는 남성 우월주의나 남성들의 무능과 무책임에 무참히 희생되고 있는 여인들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힐책하는 대목은 없다.

심지어는 사촌누이의 몸을 더럽혀 그네로 하여금 참담한 비운의 나락에 빠지게 하는 강모의 일탈된 행위조차도 쉬이 돌을 던질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작가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흑백논리로 다루지 않고 복잡다단한 인과관계 속에서 어쩌면 서로가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넌지시 내비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인생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껏 더 넓히게 한다.
 
네가 미술학도이니까 짐짓 해보는 말이다만, 소설 '혼불'에는 흘러간 시대의 시대상을 극명하게 표현한 풍속화라든지 우리 강산의 빼어난 자태를 그려낸 고운 빛깔의 수채화들이 이야기의 갈피갈피에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또한, 소설 '혼불'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딱히 어디라고 할 것 없이 펼치는 페이지마다 구수한 전라도 방언을 비롯한 살가운 우리의 토속어들이 제 나름의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손에 소설 '혼불'이 들려져 있는 오늘, 이 '혼불'을 조탁(彫琢)해낸 작가 최명희 씨는 정작 우리의 곁에 있지 아니하니 이 어찌 애달프다 아니할까.

작가는 1980년 봄 4월부터 '혼불'의 첫 장을 쓰기 시작하여 1996년 12월에 이르기까지 만 17년간 애오라지 이의 집필에 투혼하다 마침내 '혼불' 제5부 10권을 내 놓고 홀연히 세상을 떠나갔다.

'혼불'에 혼을 쏟아 붓느라 이녁의 몸을 망가트리고 있는 '암'과의 싸움을 뒤로 미룬 탓이라니, 그녀는 아마도 이 '혼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소진시켜 버렸나 보다.
 
혼불이 무엇인가?
혼불이란 사람의 몸 안에 있는 불덩어리라고 한다. 사람이 제 목숨을 다하고 죽을 때, 미리 그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혼불은 이를테면, 사람의 넋이요, 정신인 셈이다. 다시 말해 존재의 핵(核)이 되는 불꽃인 것이다.

청암부인의 그것(혼불)이 손부 효원에게 옮겨졌듯이 혼불은 일찍이 저 선대(先代)의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오늘의 자손에게까지 이어져 오면서 가문의 줄기와 가지로 뻗어나가고 그것은 곧 우리 민족의 원형질이 되고 민족혼과 웅혼(雄渾)한 기상(氣像)이 되었느니라.

지난 세월, 일제에 무참히 짓밟히고 동족상잔의 참상을 치르면서도 우리가 이만큼이나마 일어서 있는 것도 다 저 위로부터 내리 받은 혼불을 꺼뜨리지 않았음에 연유하는 것이리라.

때는 바야흐로 세계화의 물결이 드세게 일고 있다. 그런데 세계화가 무엇이냐?
줏대 없이 남의 흉내나 내고 남의 장단에 춤추는 것이 세계화라더냐?

아니리라. 제 근본, 자기 주체(主體)를 확고히 하는 가운데 더불어 함께하는 세계화라야 진정한 세계화일 것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도 있지 않느냐.
 
아, 그런데 모두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흔들리고만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다가 우리의 혼불을 다 사그라뜨릴까 적이 걱정된다.

전주고보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강모의 역사 선생, 심진학은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국토와 마을과 집안마다 흘러내리는 이 숨결과 이야기를, 갈피마다 주워 담아 품고 길러서,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른다.> (제2부 3권 226쪽)

그래, 아마도 너희 세대가 심진학 선생이 말하는 그 마지막 세대, 이 민족의 혼불을 붙들고 지켜야 할 마지막 세대인지 모를 일, 부디 깨어있어 주기를 바란다.

너처럼 문학에의 꿈을 지니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 중 누군가가 최명희의 혼불을 이어 받아 제2, 제3의 최명희로 되살아나고 아울러 또 다른 '혼불'이 탄생되었으면 한다만, 그 바람이 비단 문학에만 국한하랴.

역사를 배우는 젊은이들은 역사의 혼불을, 과학을 하는 이들은 과학의 혼불을, 예술의 길을 걷는 이들은 예술의 혼불을ㆍ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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