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질고 착한 사람 되거라
엉뎅이 또다려 주시던 할머니
아무래도 봄볕이 그런 것 같애
풀잎도 개나리도 엉덩이를 내민다
-강동주의 <봄볕> 전편
"눈에 확 드러나는 낱말이 있지?"
"네, 엉뎅이요."
"왜 엉뎅이가 드러나는데?"
"하하하, 엉뎅이잖아요."
"그래, 그런데 앞에서는 '엉뎅이'이라고 쓰고 뒤에서는 왜 '엉덩이'이라고 썼을까?"
"실수를 해서요."
"와하하하하하하"
맨 뒷줄에 앉은 떠꺼머리 녀석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 교실 안이 웃음바다가 된다.
"실수는 아닌 것 같은데 누가 이야기해 볼 사람?"
"엉뎅이는 할머니가 또다려 준 것이고 엉덩이는 봄볕이 토닥거려 줄 거니까요."
볼 붉힌 채 눈빛이 별빛처럼 빛나는 고운 녀석이 앞줄에 앉아 얌전을 떨며 대답한다.
"선생님 보충 설명이 필요 없네. 그럼, 할머니랑 대응되는 시어는 뭘까?"
"봄볕이요."
일제히 나오는 대답소리가 시원하다.
따뜻한 봄볕을 바라보는 것은 체험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봄볕에서 할머니의 따스한 사랑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일상이 아니다.
일상을 넘어서는 특별한 체험이다.
봄볕의 따스함에서 할머니의 따스함을 떠올리고 풀잎과 개나리에 와 닿은 봄볕으로, 어린 나의 엉덩이에 와 닿은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떠올리는 것은 특별한 체험이다.
이처럼 문학 작품은 일상의 모든 체험을 제재로 삼으면서도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을 표현한다.
이런 체험은 나만의 특별한 체험이지만 다른 많은 사람도 봄볕이라는 시를 읽어보게 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체험이 된다. 공감하는 것이다.
이처럼 문학은 가치 있는 체험을 표현하는 예술인데, 그 체험은 개성이 있으면서도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왁자지껄 하던 교실이 별안간 너무 조용하다. 눈빛이 별빛 같던 녀석마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모란이 지고 사향장미 필 때쯤이면 어떻게 넘겨야 할까.
그때부터 벌써 방학을 기다리게 되어서는 안 될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