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의 독립을 되찾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3년 동안 해외에서 모진 고행을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업, 공업, 상업 등 실업을 일으켜 나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의 자유 독립을 되찾으면 죽는 자 남은 한이 없겠노라."이천만 동포들에게 남긴 이 글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당하기 전날인 1910년 3월 2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1909년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과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한 안중근. 동지 우덕순·조도선·유동하와 함께 이강의 후원을 받아 이토오 처단을 위한 은밀한 계획을 세우고 하얼빈역에 잠입한 안중근은 역에서 러시아군의 사열을 받는 이토오를 사살한 다음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침략국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의 침략을 받은 아시아 여러 나라사람들의 민족혼에 불을 질렀다.일본 관헌에게 넘겨진 안중근은 자신을 의병대장이라 소개하고 전쟁 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안중근을 뤼순(旅順)의 감옥에 수감하였다가, 이듬해 2월 재판을 거쳐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인 3월 26일, 대한의 이 열혈남아는 그렇게도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거의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며 침략야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보는 우리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