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판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광(曠)은 빈들이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넓은 들'이 아니라 '빈들'이지. '넓은 들'이라고 쓸 때의 광(廣)과 '빈들'이라고 쓸 때의 광(曠), 서로 다르지?"
"네, 날 일(日) 자가 하나 더 붙어 있어요."
"그럼 시적화자(내)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보고 무얼 느끼며 어떻게 하려하는 지 상상하면서 '광야(曠野)' 한 번 읽어보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광야(曠野)>전문
"3연의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는 구절로 봐서 '나'는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거슬러 오른적 없는 처녀림 가득한 강을 거슬러 사방천지 막힌 곳 없는 탁 트인 '빈들'을 굽어보는 언덕에 올랐어.
이 신성한 빈들에 '내'가 신문명을 세우는 거야. 큰 강물이 광야를 갈라 길을 내었듯. 이런 웅지를 갖고 광막한 들판을 굽어보는 선구자가 되어봐야 이 시를 제대로 느낄 수 있어.
그런데 '나'는 왜 풍요로운 노래의 씨를 뿌리지 않고 하필이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려 할까?"
"몰라요."
"하하, 모른다는 소리 한 번 시원하다. 성경에 보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나 성경에서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욕심(사리사욕)이 없다는 말이야. 그리고 '씨(앗)를 뿌려라'에서 자기 희생의지의 강렬함을 읽을 수 있어.
그런데 천고(千古)의 뒤는 무슨 뜻일까?"
"아득한 훗날요."
"천고(千古)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의식한 역사적 시간을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천고의 뒤'는 아득한 훗날이 아니라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내일이나 모레야.
그 내일이나 모레, 내가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가 맺은 꽃과 열매를 신성한 새 문명의 주인공들이 마음껏 부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런 신문명을 세울만한 빈들이 지금 세상이 이 지구상에 있을까?"
"아뇨."
"처음 선생님이 말한 것과는 반대로 말하게 되는데 광야(빈들)는 단순히 사람이 살지 않는 들이 아니라 신문명의 사상을 알고 있는 이가 없는 세계를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육사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보며 이 노래를 한 것이 아니야.
남산이나 북악산 위에서 자신의 위대한 사상을 아직은 아는 이 하나 없는 번화한 서울 시내를 굽어보며 사리사욕이 필요 없는(가난한) 위대한 문명세계를 건설해보겠다는 선구자, 오연히 가슴 펴고 서 있는 육사가 한 번 되어봐. 이런 큰 가슴, 큰 포부를 한 번 품어봐.""사람 없는 광활한 만주 벌판은 전혀 관계없나요?"
"관계있지. 서울의 번화한 거리와 사람 흔적 없는 만주의 광활한 벌판을 합성한 이미지를 함께 품어보면 더 큰 웅지를 품어 볼 수 있겠구나."
학철 / 시인·보광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