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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시가 있는 마을] 끝의 소리..
사회

[시가 있는 마을] 끝의 소리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6/02 00:00 수정 2005.06.02 00:00

끝의 소리는 뾰족하다
끝의 소리는 아무나 찌른다
끝을 보자,
끝을 보고
나도 살아야겠다
 
밤새도록 버스를 달려 닿은 곳이 땅 끝
가파른 목 줄기 타고 끝의 끝으로 내려갔다
끝의 끝은 둥글었다
끝의 끝은 발가락이 아니라 머리였다
 
갈증에 코를 박은 머리통
입 같고 눈 같은 곳에
뾰족한 소리 하나 숨어있었다
 
화강석의, 오석의, 캄캄한 지층으로부터
허공을 치받으며 일어나는 소리
후미진 곳에서 허공이나 치받다 제 발등으로 떨어지는 소리
끝의 소리엔 스스로를 찌르는 뜨거움이 있다
 
부르튼 발등에선 참꽃 웃고 산수유 재재거렸다
돌아서자,
돌아서서
다시 올라야겠다
 
끝의 소리는 억센 비탈로 떠미는 소리
끝의 소리는 배수진을 치고 있다
 
- 이향지의<끝의 소리> 전편-

누구나 끝에 서 본 적이 있다. 아니, 누구나 끝에 설 수 있다.

끝이라는 말이 주는 절망감, 의욕상실, 비애. 20 대 12의 긴장감. 그 극한의 암담함. 곤두섬. 그러기에 끝의 소리는 뾰족하고, 끝의 소리는 아무나 찌른다. 하지만 끝을 보자, 끝을 보고 나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끝은 더 이상 끝이 아니다.

끝이 결코 끝이 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을 걸 때, 희망으로 가득 찬 출발이야 될 수 없겠지만, 우리는 새로운 모색, 새로운 방향 감각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휴머니티이다. 휴머니티의 위대함이다.

아침 뉴스는 일가족 4명이 빚에 몰려 한강에 투신하였다고 알려 준다.

전직 교사였던 이가 도박으로 인한 부채 때문에 전국 사찰을 돌면서 불전함을 털다가 잡혔다고도 한다.

우리의 끝이 차가운 한강이거나 어두운 감방, 돌진하는 전철의 밑바닥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끝을 끝으로만 생각하는 이들, 끝의 끝이 발가락이 아니라 머리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 끝이 언제나 어둡고 뾰족할 뿐이며, 꽃 한 송이 피울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끝이 끝은 아니라고 소리치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일등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왜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이렇게 비장하게 키워야만 하는가? 일등이 아니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아니라 꼴찌를 하더라도 허공을 치받으며 일어나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아이로 키워야 하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할 일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부르튼 발등으로 참꽃, 산수유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될 것이다.

어떠한 억센 비탈에 놓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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