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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조선사발이 '막사발'이라고?"..
사회

"조선사발이 '막사발'이라고?"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6/02 00:00 수정 2005.06.02 00:00
사기장 신한균의 '우리 사발 이야기'

우리 그릇 연구 10년 공력을 '책'으로 빚어낸 장인이 있다.
일본은 왜 조선사발을 '막사발'이라 하면서 뒤로는 전 국민이 애지중지하는 국보로 삼았을까!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사발의 역사를 쫓아 왜곡된 우리 그릇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사기장 신한균의 '우리 사발 이야기'
조선사발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사기장의 애정 어린 눈길을 이제 만나보자.

 

막사발?

누가 우리 사발을 일러 '막사발'이라 했던가?

'막-'이라는 말은 일부 이름씨 앞에 붙어 '닥치는 대로', '함부로'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사다. 또 '거친', '아무렇게나 생긴', '허드레의'의 뜻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닥치는 대로 하는 육체노동, 대수롭지 않은 허드렛일을 '막일'이라 하고, 막일을 해 돈을 버는 일을 '막벌이', 아무렇게나 생겨 쓸모없는 돌을 '막돌', 거칠게 짠 베를 '막베'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막-'이라는 접두사의 이런 쓰임으로 본다면 '막사발'은 그다지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조선사발은 결코 제멋대로 구운 막사발이 아니다."

예술미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사발이 한낱 막사발로 홀대받는 것을 참지 못해 10여년의 짧지 않은 세월을 애오라지 우리 그릇 연구에 매달린 이가 있다.

최근 <우리 사발 이야기>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낸 사기장 신한균씨가 바로 그 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사발을 직접 보고 이것이 결코 제멋대로 구운 막사발이 아님을 확신했다. 그때부터 규장각의 고문서를 뒤지기도 하고 일본의 미술관과 개인 소장가들을 만나는 등 '막사발'로 불리는 우리그릇의 '뿌리 찾기'에 온 열정을 다 바쳤다. 그러기를 10년이 넘고 11년이 되어 마침내 그릇이 아닌 한 권의 책을 빚어낸 것이다. 

그런데 '그릇장이'가 그릇이나 잘 만들면 될 일이지,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사발 연구는 무엇이며 책은 또 무슨 책인가? 

사기장 신한균은 우리 전통의 조선 사발을 최초로 재현해 낸 도예가 신정희 옹의 맏아들로 1960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 말기에 출생해 전쟁의 혼동기를 거치면서도 오직 사발에만 매달려 국내 도예계의 일인자의 자리에 오른 신정희 선생이 바로 그의 부친인 것이다. 선생은 국내에서의 명성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중앙방송과 황실에서 이도다완의 재현작가로 인정한 그릇 세계의 실로 큰 그릇이다. 가족보다도 도자기가 더 우선이었던 그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 눈만 뜨면 옆에 있던 사금파리들이 지겨웠다는 그는 철이 들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깨달았다. 그러니 사기장 신한균에게 '언제 어찌하여 도예의 길에 들어섰느냐'고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질문이다. 그가 세상에 태어난 그날이 곧 도예입문의 날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가 대학과 대학원(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던 것은 외도가 아니다.

단순한 기능인이 아닌, 마음으로 그릇을 빚고 거기에 혼과 얼을 담는 도예가가 되기 위해서는 드넓은 세상에 나가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삶의 지평을 한껏 넓혀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도자기를 섭렵하기 위해 바깥나들이도 수월찮게 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일찍이 우리 옛 사발들의 실체를 모른 채, 그냥 일본책에 등장하는 사진만 보고 그릇을 빚어왔다. 그리고 그 사발들을 가지고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물론 이 전시회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던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사기장 신한균의 귀에 일본인들의 소리 없는 빈정거림이 들려오는 듯 했다.

"자기 조상들이 빚은 사발, 그 사발의 역사와 미학도 모르면서 그냥 사발을 빚어오는 한국의 도예가들…. 사발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간파하지 못하는 너희들이 만든 지금의 찻사발은 너희들 말처럼 찻사발이 아니고 막사발이다."

이녁의 등 뒤를 스멀거리게 하는 이 소리 없는 소리. 그때부터 신한균은 우리 사발의 역사와 뿌리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뜻하게 끌어당기는 맛, 있는 듯 없는 듯한 포용성, 자연과 가까운 친화력을 품고 있는 조선 사발을 실수로 만들어진 '막사발'이라고 폄하하게 된 것은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그런 이름을 붙인 이후부터라고 한다.

1592년 임진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을 가리켜 일본에서는 차사발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탈취해간 사발은 현재 일본의 국보가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 국보가 된 도자기 '기좌이몽 이도'를 직접 본, 야나기가 한 말이 조선사발에 대한 잡기론의 모델이 된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 민예연구가로 조선 미술ㆍ공예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식견을 가지고 있던 야나기는 말했다.

"아주 평범한 물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그것도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하는 밥사발이다. 아주 볼품없는 물건이다. 전형적인 잡기다. 가장 값싼 보통의 물건이다. …개성 따위는 아무런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평범함의 극치다. …이 정도로 흔해빠진 물건은 없다. 이것이 틀림없는 천하의 명기, 대명물의 정체다."

신한균은 자신이 쓴 <우리 사발 이야기>에서 야나기의 그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가 보기에 야나기 주장의 결론은 "그 더러운 조선의 잡기에서 미를 발견하여 천하의 명물로 승화시킨 우리 일본인들의 심미안은 위대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막사발'이란 명칭 속에는 저들의 무서운 식민지 지배논리가 숨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를 일본 국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을 포함한 수다한 한국인들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분통이 터져 신한균은 팔을 걷어붙였다.

"그래! 나는 신정희의 큰아들이다. 아버지가 이것을 최초로 재현했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것들이 정말 우리 민족에게 '막사발'이었던가?"

그로부터 사기장 신한균은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이것에 관한 책과 옛 기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사발들에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고 이 사발들의 역사를 살짝 위장해놓고, 또한 사발들의 미학을 교묘히 일본인의 미학으로 바꾸어놓은 그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 사실들을 기록, 아니 책으로 남겨야 한다. 그것이 한국 사기장으로 태어난 나의 운명이다."

신한균의 '열병'은 책을 쓰지 않고는 고칠 수 없는 중병이었다. 그는 옛 가마터를 누비기도 하고, 조선사발이 있다는 미술관뿐만 아니라 명품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개인 소장가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녁의 손으로 직접 만져보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기도 했다. 우리 것을 가져가 자기네 보물로 삼으면서 '판권'을 행사하고 있는 터라 이를 책에 기재하기 위해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그 비용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본 학자가 왜곡한 우리 도자기의 역사적 진실을 찾아내고 또 식민사관과 왜독에 중독된 우리 사발의 본질을 바로잡는 일이라면 아무리 비싼 대가라도 기꺼이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한균의 <우리 사발 이야기>는 지난 11년 동안 그가 연구해온 결과물과 각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사기장이 부르는 사발의 노래'인 셈이다.

총 열 대목으로 나누어 1~4장에서는 조선사발의 역사와 이것들의 고향, 그리고 이것들이 조선시대에 어디에 쓰이던 사발인가를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5~6장에는 흙과 불 이야기, 7~10장에는 사기장이 느낀 사발에 대한 단상과 사기장과 관계된 내용들이 담겨있다.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선 사발들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사기장의 애정 어린 눈길을 만나게 된다. 535쪽, 만만찮은 분량이지만 특유의 '하오체' 문장으로 마치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듯 글을 풀어나가기 때문에 읽기가 편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사발들의 진기한 사진 400여 장도 함께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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