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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문화초대석] 고쳐 쓰기
사회

[문화초대석] 고쳐 쓰기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6/23 00:00 수정 2005.06.23 00:00

"오늘은 시 창작 연습 중 가장 기초가 되는 패러디 한번 해 보자. 시 한편을 다 패러디하는 것은 나중에 하고 이 시간엔 시어(詩語)나 시구(詩句)를 하나 비워 놓고 그 비운 자리를 채워 넣는 연습을 해 보자."

"더운데 오늘은 그냥 이야기나 한 자루 해 주세요.", "문제 풀이나 해주세요.", "더워요." 와글와글 시끄러운 가운데 칠판에 짧은 시 한편을 적으며 물어봤다.

"여름 저녁에, 일한 소에게 물을 먹이면 한번에 얼마나 마실까?"

"1리터요. 아니, 2리터요." 그냥 웃었더니, "아니, 2리터 생수 병으로 서너 개는 충분히 먹을 것 같은데요."

"2리터 생수 병으로 한번에 열대여섯 병 분량 이상 먹는다."

"우와~ 완전 소네요." "와하하하. 소더러 완전 소래."

이때다 싶어 수업하기 싫어하는 놈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난리법석을 부린다.

물 먹은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 서로 □□하다고. 
김종삼의 <묵화(墨畵)> 전문

"이 시에서 □□에 어떤 낱말을 넣으면 좋을까? 시 제목을 생각해 봐. 묵화(墨畵)는 여백(餘白)과 먹(墨)의 농담(濃淡)으로 이미지를 제시하는 동양화잖아. 낮에 할머니는 하루 종일 밭을 매고, 고추도 땄을 거야. 다른 사람 없이 할머니 혼자서. 그 할머니 옆에서 소 역시 혼자 풀을 뜯으며 할머니 곁을 지키며 하루 내내 서 있었겠지. 이윽고 산그늘 길게 내려와 소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가 하루 종일 목말랐을 소에게 물을 먹이며 소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

"하하, 한번에 30리터도 더 마신, 완전 소~. 와하하하."

"하루 종일 찾아 온 사람 하나 없는 저녁 무렵 산골 외딴 집 모습이 눈에 선하지? 낮 동안 내내 서서 일을 해 발잔등이 퉁퉁 부은 할머니가 연민의 눈으로, 정으로 물 먹은 소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모습이, 이런 모습이 눈에 선하게 묵화로 피어나게 하는 한 낱말을 찾아 봐."

"편안하다고."

"왜?"

"힘든 일이 이제 끝났잖아요."

"허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너무 한 부분에 치우친 답 같네. 다른 답을 찾아보자."

"불쌍하다고."

"좀 나은 것 같은데 너무 주관적 감정을 바로 말해서 시적인 표현으로는 좀 문제가 있네."

"힘들다고.", "가련하다고.", "쓸쓸하다고."

"힘들다고는 불쌍하다와 비슷하고, 가련하다고는 감정을 객관화한 점이 좀 나은 것 같네. 쓸쓸하다고는 분위기와도 어울리고 한결 낫구나. 시인은 뭐라고 했을까? 시인은 '적막'이라는 낱말을 넣었어. '적막'이라는 말이 들어가니 분위기가 다른 것과는 확연하게 달라지지?"

"분위기가 칼라에서 흑백으로 바뀌는 것 같네요."

"와~  참 좋은 표현이다. 묵화라는 제목이 그대로 살아나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구나. 그럼 다른 시 한편을 보자."

―절망한 자는 대담해 지는 법이다 : 니체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최승호의 <인식의 힘> 전문

나는 내 시의 짧은 다리 때문에 얼마나 절망했을까. 절망이 부족해서 날개 돋힌 시를 아직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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