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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문화초대석] "유년의 추억이 어린 양산은 스케치 코스의..
사회

[문화초대석] "유년의 추억이 어린 양산은 스케치 코스의 으뜸"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6/30 00:00 수정 2005.06.30 00:00
양산이 낳은 서양화가 - 안세홍

서양화가 안세홍- 그림에 큰 관심이 없는 이들이야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웬만큼 그림에 대한 식견이 있는 이들에게는 서양화, 그 중에서도 수채화로 일가를 이룬 이 화가의 이름 석자 ‘안ㆍ세ㆍ홍’이 꽤 친숙하다.

그런데 이제는 중진을 넘어 우리 화단의 원로급에 속해 이름 뒤에 ‘화백’이라는 호칭이 따라붙는 이 화가가 양산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양산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안 화백은 1939년에 우리 고장 북부동에서 태어나 청소년시절까지를 여기서 보냈다. 대학공부를 위해 대처인 부산으로 나갔다가 그대로 부산에 눌러앉긴 했지만, 양산사람 안세홍 화백의 양산사랑, 고향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고향을 떠나 있으면서도 자주 양산을 들락거리며 고향과의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안 화백은 한국미술협회 양산지부가 첫 발을 내디뎠던 1997년부터 양산미협에 참여해 양산미협의 오늘이 있기까지 고향의 후진들을 보살피고 다독거리면서 양산미술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미술협회 양산지부의 여덟 번째 정기 회원전이 열린 6월 24일 해거름, 양산미술회관 앞뜰 벤치에서 안 화백을 만났다.

“어렸을 때의 어머니 손맛을 평생 잊을 수가 없는 것처럼, 그 시절의 정서와 추억 또한 그와 같은 것이지요. 그런 탓에 저는 지금도 양산의 오묘한 아름다움에 이끌려 스케치 여행의 행선지를 주로 양산으로 잡습니다.”

그렇구나. 이 화가의 그림에 흐르고 있는 고즈넉하고 단아한 기품의 모태가 바로 양산이었구나. 이 이가 즐겨 그리고 있는 산자락과 들판이 바로 양산이었구나.

“부산의 범어사를 출발해서 양산의 석계, 신평을 거쳐 경주로 이어지는 코스에는 참으로 풍부한 그림 소재가 널려 있습니다. 계곡이 있는가 하면 능선이 있고, 부드러운 산자락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따라 발길을 옮기다 보면 얼마 안가서 곧 바다를 만나는 이 천혜의 코스는 서울 화가들도 몹시 부러워하는 스케치 코스죠.”

오늘날 한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이들이 대개 그렇듯 안 화백 또한 어릴 때부터 그림 재주가 뛰어났다. 그가 네 살 먹던 어느 날, 우연히 집에서 기르던 개를 그린 것을 본 그의 아버지가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겨우 네 살짜리가 우째 이리도 세밀한 묘사를 할 수 있담?” 이녁도 손재주가 남달라 무엇이든 곧잘 만들어 내는 터였지만, 네 살 배기 아들이 그린 그림이 마냥 신기하고 놀라워 아들의 그림을 들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다.

이듬해 어린 세홍이 한 해 전보다 더 빼어난 솜씨로 장닭을 한 마리 그려내자 아버지는 다시 한 번 놀라고 동네 어른들도 양산에 신동이 하나 났다며 다들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도 동네 어른들과 친척들은 재주 있는 아이가 행여 ‘환쟁이’가 될까봐 걱정들을 했다. 그림을 그려서는 평생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어른들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개화사상에 진보적 사고를 지니고 있던 세홍의 아버지는 위로 두 딸을 낳고 마흔 여섯이 되어서야 어렵사리 얻은 어린 외아들의 재주가 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환쟁이라니? 우리 세홍이는 필시 유명한 화가가 될 것이야.” 이때부터 아들 세홍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과 사랑은 각별했다. 그 무렵 양산에 한 대 있을까 말까한 자전거에 아들을 태우고는 멀리 부산까지 나들이를 하며 어린 아들에게 견문을 넓혀 주었다.

“부산 영도다리 부근에 있던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엘 자주 갔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자전거로 어떻게 그 먼 곳까지 가셨나 싶습니다. 미나까이 맨 위층인 5층에서 목마를 탔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그리고 그 시절, 아무나 쉽게 먹을 수 없었던 밀감을 사 주시기도 하셨는데 요즈음도 가끔 밀감 껍질을 깔 때는 아버지 생각에 울컥 목이 멥니다.”  
 
이렇듯 유복하기만 했던 유년시절. 그러나 그의 나이 열 살 때, 아버지가 홀연히 세상을 떠나시면서 그만 그의 유년의 호강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홀어머니 손에 거두어져야 했던 어린 세홍에게 현실은 막막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중학교 진학을 위해 치렀던 국가고시에서 양산지역 수석을 해 부산의 개성중학교로 진학을 했지만, 월사금(수업료)을 제때 내지 못해 쫓겨 다니기를 되풀이 하느라 공부가 영 손에 잡히지 않아 고등학교는 본시 그가 원했던 부산 제2상업학교(부산상고의 전신)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오늘날 양산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양산농고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뜻밖의 행운이 될 줄이야… 양산농고에 한 훌륭한 미술선생님이 계셨으니, 그이가 바로 이태규 선생님이었다. 선생은 세홍의 미술적 잠재력에 불을 지폈다.

이태규 선생의 지도로 유화 수채화 등 그림의 기초를 다지면서 사물을 보는 안목과 그것에서 느낌을 얻어내는 감성을 한껏 넓히고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이내 대학을 진학할 형편이 못 되었던 안세홍은 고교 졸업 2년 후에야 자형으로부터 첫 등록금을 얻어 간신히 부산사범대 미술과에 입학을 한다. 스스로 학비를 마련해야 하는 대학생활은 힘겹고 고달프기 이를 데 없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곧 바로 교단에 서면서 비로소 신산스러웠던 세월에 한숨을 돌린다.

부산여중 경남중을 거쳐 경남고를 마지막으로 10년의 교직생활을 마감하고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서 오늘까지 애오라지 그림만을 위해 살아온 안세홍 화백에게 그림은 무엇일까?

“모든 예술은 서정성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사물을 보고 좋은 느낌을 가져 그것을 드러내면 그것이 곧 예술이죠. 저는 동양의 옛 선현들이 갈파했던 형사신사(形似神似)론에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형사’가 사물의 단순한 외형적 묘사를 일컫는 것이라면 ‘신사’는 사심을 버리고 정밀한 관찰을 통해 사물의 변화 이면에 있는 사물의 본질적 속성을 그려내는 것을 말하지요. 사물의 형상을 아무리 잘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 사물의 이면에 담겨 있는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을 두고 예술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안 화백이 미술의 여러 장르 중에서 굳이 수채화를 선호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가?

“어느 것이 더 낫고 못하고가 없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수채화를 생선이나 야채라고 한다면, 유화는 육고기라고 할까? 흔히 수채화는 유화의 전 단계로 생각하거나 유화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 든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물감을 겹쳐 칠했을 때 안쪽의 색이 은은히 비쳐 보이는 맑고 투명한 느낌은 유화 물감으로는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 수채화의 장점이죠. 또한 수채화는 유화와는 달리 수정을 허락지 않기 때문에 작가의 세련미가 더 많이 요구되는 장르입니다.”

그러고 보니 ‘수채화는 시간을 그리는 것’이라고 했던 어느 글귀가 떠오른다. 한 번 붓을 긋고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며 색과 형태가 종이에 스몄다가 마르면서 제 빛깔을 찾을 때까지 관심어린 눈빛을 보내는 조용한 기다림, 어쩌면 안 화백 자신이 한 폭의 수채화이려니 싶다.     

“어떤 스타일이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다만 작품에 속기가 끼여서는 안 됩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요. ‘그림값을 제법 두둑이 받아야지’하고 그리는 그림은 백이면 백 실패작이 되고 맙니다. 붓을 들고 물질적 계산을 하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상북면 신전리 테마공원이자 개인 역사유물관인 ‘솔바람 머무는 곳’ 마당에 안 화백의 그림비가 세워져 있다.
2002년 1월 안 화백의 제자인 이동국(전 한국미협 양산지부장)씨와 후배 김주홍씨 등이 주축이 돼 세운 이 그림비는 작고한 화가가 아닌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는 현역 화가의 그림비라는 점에서 당시 지역 문화 예술계에 잔잔한 화제를 뿌렸었다.
이는 안 화백의 후배들과 제자들의 안 화백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어떠한 지를 설명해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혼자 보는 것은 형벌’이라고 했던 조병화 시인의 말을 인용하며, 아름다움을 혼자만 보는  ‘형벌’을 치르지 않기 위해 인생 70고개를 바라보는 오늘도 여전히 손에서 화구를 놓지 못한다는 안세홍 화백.

오래 전 청년교사로 만났던 제자들과 자신의 아틀리에를 다녀간 제자들이 2천명은 족히 될 것이라는 안 화백에게 그 제자들이 저마다의 작품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것 보다 더 큰 보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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