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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시가있는 마을] 노루
사회

[시가있는 마을] 노루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7/14 00:00 수정 2005.07.14 00:00

지난 일요일엔 아이들 기말고사라 저희끼리 집에서 조용히 공부하라 하고 장마 비 맞으며 장인어른, 장모님 모시고 청송 가서 옻닭 먹고 왔다.

비 때문인지 인적 보이지 않는 숲속 마을이 좋아 보인 것일까. 집사람이 "이젠 저런 깊은 산골에 살고 싶어" 한다.

고추밭께에 얼른거리며 스친 것이 노루였을까? 요즘 노루는 희귀동물인데.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겨울방학을 이틀 앞두고 자취눈이 희끗하니 내린 날 학교에서 단체로 토끼 사냥을 나갔다. 학교에서 오 리 남짓 걸어가 솔뫼마을 뒤 야트막한 야산 하나를 에워싸고 중·고등학교 천여 명 학생들이 다복솔 밑을 몽둥이로 쳐 가면서 토끼몰이를 했다. 한참을 올라가도록 토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산 아랫자락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올라왔다. 거기 쳐 놓은 흰 차일 사이로 몇 줄기 연기가 높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 사이로 흰옷 입은 사람 몇이 오간다. 토끼 못 잡아도 우리들 나눠먹을 돼지국밥 짓고 있을 것이다.

토끼가 내게로 오면 정말 몽둥이를 휘둘러야 할까 어쩔까 가벼운 고민을 하는데,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노루다, 노루!" 하는 소리가 저쪽 골짝에서 들리더니 큰 개만한 키의 노루 한 마리가 뛰어오다 등성이 위에서 잠시 멈칫 서며 뒤돌아본다. 내게로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 옆으로 파고들며 노루가 후다다닥 쏜살같이 지나간다. 한 굽이 돌아서며 잠시 멈추어 고맙다는 듯 뒤돌아보더니 겅중겅중 좁은 들을 가로질러 건너 산으로 들어간다.

'아, 여름에 봤던 그놈이었을까?'
담배 곁순 따러 못 옆 담배 밭에 들어서다 보니 작은 강아지만한 놈이 초롱한 검은 눈으로 올려다본다. '애기 노루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서 한참을 들여다봐도 그냥 빤히 건너보기만 한다. 문득 잡고 싶은 생각이 들어 손을 뻗으려 마음만 먹었는데 녀석이 후다닥 달아나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 낡은 기와집, /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 느릅나무 /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구비를 / 청노루 / 맑은 눈에 / 도는 / 구름
박목월의 <청노루> 전문
 
 <청노루>는 운율이 의미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면서 곧잘 예로 들어 살펴보는 시이다.
이 시는 네 토막 단위로 읽어 진다. 1연과 2연은 1행이 각 2음보로 되어 있는데 3연에서는 제 1행이 1음보, 2행이 (속잎 / 피어나는 / 열두 구비를) 3음보가 되면서 율조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독자의 호흡에 긴장을 부여하여 청노루가 걸어 내려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제4연과 5연은 1행이 1음보씩이면서 4음보를 두 연으로 나누어 아주 느린 호흡으로 읽게 한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는 움직이던 청노루가 멈추어 서서 올려다보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이런 운율적 효과와 함께 시의 내용을 풀어보면, 멀리 자주빛 노을이 내린 듯한 봄산 속에 낡은 기와지붕 한 귀퉁이가 보인다. 여기까지 오면 세속 티끌은 이미 멀기만 하다.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청운사로 오르는 열두 굽이 길에 서니 청노루 녀석이 반갑게 내려와 올려다본다.

 '바깥세상은 어땠어요? 아직 비린내가 조금 남아있는 것 같아요.' 녀석은 얼른 다가와 뺨 비비지 않고 말똥말똥 쳐다보기만 한다. 녀석 맑은 눈 속엔 아른아른 푸른 하늘이 펼쳐 있고 그 가운데 한가로이 떠 있던 흰 구름 한 점이 눈망울을 껌벅이지도 않는데 천천히 도는 것 같다.

 '그래, 이놈아, 이제 바깥 비린내 또 묻히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이미 속진(俗塵) 다 씻은 산림처사가 청노루 더불어 고개 들어 천천히 느릅나무 숲길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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