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곁순 따러 못 옆 담배 밭에 들어서다 보니 작은 강아지만한 놈이 초롱한 검은 눈으로 올려다본다. '애기 노루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서 한참을 들여다봐도 그냥 빤히 건너보기만 한다. 문득 잡고 싶은 생각이 들어 손을 뻗으려 마음만 먹었는데 녀석이 후다닥 달아나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 낡은 기와집, /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 느릅나무 /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구비를 / 청노루 / 맑은 눈에 / 도는 / 구름
박목월의 <청노루> 전문
<청노루>는 운율이 의미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면서 곧잘 예로 들어 살펴보는 시이다.
이 시는 네 토막 단위로 읽어 진다. 1연과 2연은 1행이 각 2음보로 되어 있는데 3연에서는 제 1행이 1음보, 2행이 (속잎 / 피어나는 / 열두 구비를) 3음보가 되면서 율조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독자의 호흡에 긴장을 부여하여 청노루가 걸어 내려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제4연과 5연은 1행이 1음보씩이면서 4음보를 두 연으로 나누어 아주 느린 호흡으로 읽게 한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는 움직이던 청노루가 멈추어 서서 올려다보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이런 운율적 효과와 함께 시의 내용을 풀어보면, 멀리 자주빛 노을이 내린 듯한 봄산 속에 낡은 기와지붕 한 귀퉁이가 보인다. 여기까지 오면 세속 티끌은 이미 멀기만 하다.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청운사로 오르는 열두 굽이 길에 서니 청노루 녀석이 반갑게 내려와 올려다본다. '바깥세상은 어땠어요? 아직 비린내가 조금 남아있는 것 같아요.' 녀석은 얼른 다가와 뺨 비비지 않고 말똥말똥 쳐다보기만 한다. 녀석 맑은 눈 속엔 아른아른 푸른 하늘이 펼쳐 있고 그 가운데 한가로이 떠 있던 흰 구름 한 점이 눈망울을 껌벅이지도 않는데 천천히 도는 것 같다. '그래, 이놈아, 이제 바깥 비린내 또 묻히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이미 속진(俗塵) 다 씻은 산림처사가 청노루 더불어 고개 들어 천천히 느릅나무 숲길로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