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현은 1949년 서울에서 '잘 나가는 집안'의 귀공자로 태어났다. 4·19혁명 무렵 법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가 그의 부친이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씨가 그의 누나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홍진기는 이병철 전 삼성 회장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중앙일보 회장을 맡는 한편 사돈까지 맺게 됐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홍석현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됐음은 물론이다.홍석현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온 뒤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산업공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를 따냈다. 1983년 귀국한 뒤에는 재무부 장관 비서관,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경영수업을 받기 위해 삼성에 들어온 것은 1986년. 삼성코닝에서 8년 동안 상무이사, 전무이사, 부사장을 역임했다.홍석현은 45세가 되던 해인 1994년 '꿈에도 그리던' 중앙일보에, 그것도 대표이사 사장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의욕에 넘쳐 있던 이 '젊은 사장'은 섹션신문, 전문기자, 가로쓰기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제도를 과감하게 도입하면서 당시만 해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한참 뒤져 있던 중앙일보의 영향력을 빠른 속도로 끌어올리는 끌차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물론 중앙일보의 이러한 급성장의 배경에는 삼성그룹이라는 대재벌의 지원사격이 있었음은 불문가지이다. 실제로 당시까지만 해도 중앙일보 회장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겸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일보가 불을 붙인 무한적인 물량경쟁은 1996년 지국장 살해사건으로 상징되는 '신문전쟁'으로 비화됐다. 이 전쟁의 와중에서 '재벌신문'과 '족벌신문'의 치부와 폐해가 적나라하게 폭로됐고, 전 사회적으로 '신문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중앙일보는 1999년 3월 삼성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면서 명실상부한 '홍석현의 중앙일보'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부푼 꿈도 잠시, 홍석현은 그해 10월 자신이 대주주로 있던 보광그룹 탈세사건으로 쇠고랑을 차야 하는 비운을 맞았다. 당시 일부 중앙일보 기자들이 검찰청사까지 달려가 "사장님 힘내세요"라고 외침으로써, 기자가 언론개혁의 '주체'에서 '대상'으로 전락했던 사건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그러나 홍석현은 보라는 듯이 부활했다. 탈세라는 파렴치한 범죄 행위에도 불구하고 보석으로 석방됐으며, 얼마 후에는 도리어 회장으로 영전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참여정부의 주미대사로 발탁됐고, 최근에는 유엔(UN) 사무총장에 출마하겠다는 포부까지 밝혔다. 그런 그에게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1997년 대선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대선자금 심부름을 했다"는 뉴스는 아마도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을 것이다.홍석현은 중앙일보를 '한국의 워싱턴포스트'로 키우고 싶어했다. 오죽하면 워싱턴포스트 회장이던 그레이엄 여사가 사망하자 직접 추모사를 써서 중앙일보 지면에까지 발표했겠는가. 워싱턴포스트는 닉슨을 사임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유명하거니와, 홍석현이 지금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의 장본인 중 한 명으로 불명예스럽게 거명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지환(여의도통신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