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3분, 서대문형무소에서 한 사형수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공평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진보정치가,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여 표를 획득,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위협했던 현실정치가,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에 대한 사형집행이었다. 1심 재판부는 그가 양명산이란 인물을 통해 북과 접촉하며 정치자금을 받고 기밀서류들을 넘겨주었다 하여 그에게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씌워 5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검찰의 항고로 열린 2심 재판에서 1심에서 무죄로 결론 난 간첩죄를 다시 덧씌워,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50년대 중반 진보를 표방하며 ‘책임지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인 평화통일’을 당 강령으로 내걸고,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죽산 조봉암.그에 대한 사형집행은 진보적인 혁신정당, 나아가 이 땅의 진보주의에 대한 사형집행과 다름없었으니, 그의 죽음 후 이 땅의 진보주의는 한동안 맥이 끊겼기 때문이다.진보적인 현실정치가 조봉암의 죽음과 진보당의 실패는 한국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특히 대통령선거에 두 차례나 출마했던 현역 야당 대통령후보가 재심청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점은, 당시 재판의 공정성과 함께 “과연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은 법원의 선고이유대로 ‘대한민국을 해체하려는 불온한 조직’이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