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패망 소식이 전해지자 양산의 지역유지들과 젊은이들은 광복의 소식을 이웃에 알리는 한편, 손에 손에 태극기를 받쳐 들고 광복의 감격을 마음껏 누렸다. 광복의 환희와 만세소리가 2~3일간 계속된 뒤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자 양산의 항일운동가들과 청년들은 8월 18일 김철수, 이기주, 최학선, 지영대, 이종군 등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 양산지부를 결성했다. 건준은 처음에는 좌우 연합적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1945년 9월 1일과 2일을 전후하여 미군상륙을 알리는 ‘미군포고령’이 반도에 뿌려지고, 여기에 고무된 우익진영의 독자적 움직임이 가시화하자 서울의 건준과 조선공산당은 광복정국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미군상륙 이틀 전인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을 결성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인공’으로 서서히 재편되어 갔다. 중앙의 인공과 함께 지방에서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좌익과 우익 사이의 정치 이념적 대립 또한 서서히 굳어갔다. 10월 5일 이후 좌익과 우익의 대립 구도 속에서 양산의 정치지형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8월 18일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양산지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좌파 중심의 인물들로 운영되자 우파의 김철수와 안종석은 양산군자치추진회를 별도로 조직하여 세력 규합을 도모했다. 이에 10월 11일 위원장 전혁, 부위원장 하문호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인민공화국 양산위원회’가 경남도 인민위원회에 발맞추어 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10월 10일 좌익진영에서 양산군청과 경찰서 등을 접수하는 것에 불만을 표시한 양산군자치추진회의 안종석이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안종석은 인민재판에서 반동분자로 몰려 총살형을 선고받고 양산경찰서 유치장에서 20여 일간 고초를 겪었으나, 나중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안종석은 구사일생으로 석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우익진영에서는 미군주둔과 함께 자신들의 물리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익청년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한편 양산인민위원회는 10월 15일 군ㆍ면 및 경찰서의 사무를 평화리에 전부 접수하고, 이날 오후 3시반 군청 직원들과 함께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온 양산이 울리도록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면서 10월말 미군이 들어오기까지 양산의 행정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전국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는 자신들의 향후 운동방침을 확정하기 위해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및 동대회의 확대집행위원회를 1945년 11월 20~25일 서울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에 양산에서는 정해룡과 김덕조가 참가하였다. [좌ㆍ우 이념대립은 날로 거칠어지고…]
한편 9월 16일부터 경남도청, 시청,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등을 접수한 해리스 준장 휘하 미군들은 10월 중순부터 경남도청의 주요 부서를 비롯해 행정과 치안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해 10월 24일 경남 각 군 신임군수를 임명하고 서서히 우익중심의 통치체제를 구축하는 가운데 양산 역시 10월 21일 미군들이 진입하여 인민위원회 지도자를 체포하고 양산군 행정을 이전의 군수에게 일임해 주었다. 1946년 10월, 38선 이남지역에서 최대규모의 농민ㆍ시민항쟁이 일어났다. 광복직후 좌익세력은 대중에 대한 영향력에서 우익을 앞서 있었던 만큼 평화적 방법으로 인민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군정 실시 이후 모스크바 삼상결정에 따른 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회담이 1946년 5월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결렬되자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한층 강화해 갔다. 여기에 대해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계열은 미군정에 대해 자신들의 역량을 보여줄 목적에서 1946년 7월 정당방위의 역공세란 신전술을 채택하고 미군정에 맞섰다. 양산군에서도 10월 8일 대규모 군중투쟁이 발생하였다. 이날 오후 1시 15분 경 양산시장에서 600여 명의 시위군중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식량공출 반대’, ‘정권의 인민위원회로 친일파 배격ㆍ처단’, ‘토지의 무상몰수ㆍ무상분배’, ‘소작료 3.7제’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양산경찰서로 이동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찰이 재빨리 출동하였으나 시위군중들이 경찰을 구타하고 총을 탈취하면서 경찰서를 공격하고는 산으로 피신하여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날 양산군의 시위는 조선공산당 양산군단에서 계획하고 주도한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양산군당은 7개 면의 농민조합,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의 조직에 각각 한 면에서 300여 명의 이상이 참가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참가한 사람들은 양산시장에 모여 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정보가 사전 누설되면서 경찰이 예비검속을 강화하자 읍내와 이웃한 양산면, 동면, 상북면, 물금면에서만 인원이 동원되어 군중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시위의 주도자로 조선공산당 양산군당 책임자이자 남로당 양산군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봉재, 부위원장이었던 박기홍, 유혁 등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와 같은 좌ㆍ우익의 대립과 갈등은 남과 북에 각각 다른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도 끈질기게 이어지면서 이 겨레들의 삶을 망가트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