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향내 나는 / 갈색 연필을 깎아 / 글을 쓰겠습니다. // 사각사각 소리 나는 /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 몇 번이고 지우며 / 다시 쓰는 나의 하루 //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로 /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 당신을 위하여 / 소멸하겠습니다.
이해인의 <살아 있는 날은> 전문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이라는 일상적 소재를 시적화자와 마주대어 놓았다. 이를 통해 시적화자는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단정하고 정직한 자세로 절대자에게 순종하며 희생과 소멸을 받아들이겠다는 삶의 자세를 다짐하고 있다. 수녀로서의 자신의 천명을 절대자에 순응하는 삶으로 일찍이 깨달은 모습이다.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내 자신의 소멸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의 자세다. 하지만 나는 많이 모자라더라도 내 삶을 담은 내 글을 쓰며 살고 싶다. 내 글이 아닌 초월자의 글을 대필하는(당신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소나무는 굵은 몸통으로 / 오래 살면 살수록 빛나는 목재가 되고 / 오이나 호박은 새콤 달콤 / 제 몸이 완성될 때까지만 살며 / 백합은 제 입과 제 눈매가 / 누군가의 어둠을 밀어낼 때까지만 산다는 것 / 그것을 알고부터 나는 / 하필 사람으로 태어나 / 생각이 몸을 버릴 때까지만 살지 못하고 / 몸이 생각을 버릴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 단명한 친구는 / 아침 이슬이라도 되는데 / 나는 참! 스물 서른이 마냥 그리운 /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슬펐다. / 딱 한 철 푸른 잎으로 파릇파릇 살거나 / 빨강 보라 노랑 꽃잎으로 살거나 / 출렁 한 가지 열매로 열렸다가 / 지상의 치마 속으로 쏘옥 떨어져 안기는 / 한 아름 기쁨일 수 없는지 그것이 가끔 아쉬웠다.
박라연의 <내 작은 비애> 전문
이 시를 읽으면 이제는 선연한 아름다움을 더 지닐 수 없는 나이가 된 아내가 가끔 ‘자식 때문에 살지 산다는 것에 더 미련 같은 것 없어.’하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소나무, 오이, 호박, 백합, 과일은 가장 아름다울 때 삶을 완성하고 끝내는데 비해 화자는 가장 아름다웠던 스물, 서른이 마냥 그리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슬퍼하고 있다. 생각이 몸을 버릴 때까지만 살지 못하고 몸이 생각을 버릴 때까지 살아야 하는 삶을 슬퍼하고 있다. 아름다움에 깊이 집착하는 여자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시다.
"삶이란 / 나 아닌 그 누구에게 /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안도현의 <연탄 한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의 지천명(知天命)이다. 여자가 꽃이라면 남자는 나무와 같다고 했다. 그래서 여자는 화려하고 곱더라도 그 아름다움 지니기 어렵지만 남자 가운데는 늙을수록 기품 있는 고목이 되는 이가 드물기는 해도 있다 했다. 내 천명은 무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