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 그러나 지금 우리는 / 불로 만나려 한다. /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 저 불 지난 뒤에 / 흐르는 불로 만나자. //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 올 때는 인적 그친 /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 전문'우리'의 만남이 '물'의 상징적 이미지로 이루어진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물'로 만나 키 큰 나무 같은 존재랑 섞여 '우리'는 '강물'로 흘러 아직 처녀(處女)인 '바다' 닿고 싶다. 빗방울 하나같은 우리나 키 큰 나무 같은 큰 존재인 우리들이 다 함께 하나가 되어 강물을 이루어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니 '우리'는 단순히 사랑하는 '그대'와 '나'일 수 없다. 또,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니 '그대'는 '나'와 아직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연인 사이가 아니다. 같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가 되어 흘러가야(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일 뿐이다.
"격동의 80년대, 민주화와 생존권 사수를 위해 분신하던 열사(烈士)로 인해 들끓던 세상. 그때 이미 숯이 된 뼈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들, 함께 타오르던 사람들이 생각나게 하는 시라고 하면 웃을 사람들 많겠지?""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흘러 아직 처녀(處女)인 바다에 닿을 수 있다면 참 좋겠지.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누구도 끌 수 없는 불로 타오르는 세상인 걸.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넓고 깨끗한 하늘을 열자'는 소망은 언제나 극복할 수 없는 현재일 뿐이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웃을 거야.""안개와 구름 같은 부분은 내 맘대로 읽어도 좋잖아. 그릴 때 좀 넣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