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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근심 한 근
사회

근심 한 근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9/08 00:00 수정 2005.09.08 00:00

태풍 '나비' 때문에 수담(手談) 친구가 결국 오지 못했다.

수담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 두런거리다보면 배울 것 많은 친구였는데. 자작으로 포도주 두어 잔 비운 덕인지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
 
지난 가을엔 황토방 벽을 뚫고 대나무 줄기 / 파랗게 솟았던 신어산 황토마루 / 이 가을 방 안에는 / 차로 말리는 노란 산국이 자리 잡고 있다 / 댓돌 밖으로 가을 깊은 밤비 / 처마 끝에서 투닥거리고 / 천하제일도공을 품고 사는 시도 쓰는 / 최군과 바둑 두다 두런두런 삶을 이야기한다 / 술을 먹지 않아 끝까지 가도록 먹지를 않아 / 형은 삶을 모른다고 한다 / 죽음에 닿도록 먹고 내 속에 있는 가장 속에 / 있는 것까지 다 쏟아내야 / 다른 사람도 다 쏟을 것 아니냐 / 그래야 삶이 속속들이 보이는 법이거늘 / 맨날 맹숭맹숭 속 다 내놓지 않으니 / 누가 또 내게 다 쏟을 것이냐 / 남이 쏟은 것 보다 / 내가 먼저 쏟아 놓아야 / 내가 토악질해 놓은 부끄러운 것 더러운 것 / 썩은 것 문드러진 것 다 보듬어야 / 삶인데 멀쩡한 껍데기만 보고 있으니 /

무슨 삶이 보이겠느냐고 한다 // 큰종은 세차게 때려야만 소리가 난다 / 어떻게 하면 나는 / 두류산처럼 하늘이 때려도 소리내지 않을까 // 남명의 싯구절을 이야기하다말고 / 성냥개비 머리로 두드려도 / 댕강댕강거리는 삶을 / 씹어보며 빗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 청도 어느 암자 젊은 스님이 / 아홉 번 덖어 온 노란 산국차는 / 엷은 향 쓴맛이 입안에 돌아 새롭더니 / 예닐곱 번 우려도 맛이 외려 깊어 한밤 건너가며 / 민중 속으로 숨은 원효 이야기도 나온다 / 욕심 내려놓고 산 속에 묻혀 살면 / 참 작은 것만으로도 환한 삶 있는 법인데 / 마음은 훤하지만 몸이 쉬운가 // 마당 끝 밤나무 아래 같이 서서 / 풀숲으로 오줌줄기와 함께 / 자잘한 근심 한 근 내려놓는다

졸시 <근심 한 근> 전문


태풍 지나간 아침이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환하게 씻겼다

울산엔 거센 바람과 함께 590 밀리미터란 기록적 폭우가 쏟아져 물바다가 된 곳들이 있다던데 여기는 큰 비나 바람 피해 없이 넘어갔다.
교정 뒤뜰로 들어서니 낙엽송 잎사귀들만 한가득 떨어져 수북수북 덩어리 지어 몰려 있다.
"낙엽송이 바람에 특별히 약한 모양이죠?"

잎사귀를 위로 들고 있는 나무는 다 약해요. 잎자루를 밑으로 늘어뜨린 나무는 바람에 강한데." 생물 선생님 대답이다. 제 분수 모르고 바람에 빳빳하게 고개 들고 맞서던 녀석들만 떨어졌다는 말이다.

"낙엽송으로 보면 빳빳한 녀석들 반쯤 버림으로써 나무가 통 째 부러지는 것 견뎠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 셈이죠. 대개 자생지가 바람 센 곳인 것들은 바람에 잘 견디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은 것들은 잎자루가 부드럽고 질기지 않아요. 필요한 것 이상으로 투자해서는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 자연도태 될 테니까요. 자연은 철저하게 경제적이죠."

"태풍도 나쁜 것만은 아니죠. 이재민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길게 보면 큰 비와 바람으로 씻어낼 것 씻어내고 솎아낼 것 솎아내어 도움 주는 것 엄청나죠." 세찬 비바람이 쓸어낸 하늘은 더 없이 맑다.

높고 푸른 하늘. 아직 낮이면 덥기는 하지만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 같다.

이 가을 무르익어 산국 말릴 때쯤엔 수담(手談) 핑계 대고 포도주 들고 이번에 오지 못한 친구 집에 '근심 한 근' 내려놓으러 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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