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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학의 나래짓으로 선비의 기품 이어가는 풍류객..
사회

학의 나래짓으로 선비의 기품 이어가는 풍류객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09/08 00:00 수정 2005.09.08 00:00
양산사찰학춤의 대가 ‘학산 김덕명(鶴山 金德明)’ 선생

학산 김덕명 선생의 춤을 본 이들은 문득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떠올린다.
어느 날 낮잠에 든 장자가 꿈속에 나비가 되어 신나게 날아다니며 자연을 즐기다가 나뭇가지에 앉아 잠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에서 깬 장자는 그만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도대체 본래 인간이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가? 아니면 본래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이렇게 있는 것인가?’

학산의 학춤이 그렇다.
‘학이 선비를 흉내 내는지, 아니면 선비가 학을 흉내 내는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는 것이다. 하얀 도포에 갓을 쓰고 너울너울 날다 내려앉아 두렁 넘어 먹이를 쪼고 다시 날아오르는 몸짓들, 깃털처럼 가벼운 디딤새며 매무새는 영락없는 학의 자태다.
그런가 하면, 나부끼는 춤사위의 품새는 자연을 이녁의 몸에 들여놓고 살고자 했던 옛 선비의 고고한 기품 그대로다. 선생의 춤은 어디에도 힘들인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군더더기가 없으니 속인의 티가 나지 않는다.

“나는 단순한 학의 흉내가 아닌, 내가 바로 학이 되는 춤을 추구합니다.”

어려서부터 팔순이 넘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애오라지 춤밖에 모르는 춤인생을 살아온 선생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춤의 흥취가 담긴 줄거리와 가락, 장단을 한 치도 즉흥으로 변질시키지 않으려 합니다. 오늘날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춤판을 들여다보면, 무국적의 현란한 춤들과 어지러운 장식, 공연한 꾸밈새에 치우친 춤들이 판을 치고 있어요. 전통춤을 계승한다고 하면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의례적인 엄정함이나 결곡한 춤의 맛을 떼어낸 춤들을 추고 있는 것을 보면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우리 전통춤을 단순한 눈요깃감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선생은 1924년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아버지 김현민(金顯珉)ㆍ어머니 이선혜(李先兮)의 5남 2녀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시 타고난 ‘끼’가 있어 그랬던지 어려서부터 난장 트는 곳을 찾아다니기 일쑤였다. 다른 구경꾼들이 모여들기 전부터 죽치고 앉았다가 구경꾼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어린 아들을 보는 부모님들의 심사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저 녀석이 필시 광대가 되려나 보다. 어차피 사람이 되기는 틀렸으니 절에나 맡겨야 하겠다. 광대가 되는 것 보다야 차라리 중이 낫지” 그렇게 하여 여덟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철없던 어린아이 ‘덕명’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입산을 하게 되고 그로부터 절간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나 그것이 한 시대의 걸출한 춤꾼이 길러지는 절묘한 인연의 출발점이었음을 어느 누가 짐작이나 하였으랴?

통도사에서 부목(입산 후 나무하는 수행), 공양주(주방에서 밥 짓는 수행), 행자(계를 받기 전의 동자승)를 거쳐 비로소 ‘고암’이란 법명을 얻기까지 그는 명무스님인 경수(景壽)스님과 대응(對應)스님으로부터 ‘지성승무’ ‘연등나례춤’ ‘연등바라춤’ ‘사찰학춤’을 두루 전수받게 된다. 그런 다음 결혼을 할 수 있는 대처승이었던 그는 평양예기였던 김농주를 양누이 삼아 양산권번을 드나들며 예능을 익혔다. 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 등 ‘학산’이 구사할 수 있는 28가지의 예능 대부분이 그때 섭렵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생이 추던 <잉어춤>도 출 수 있다. 

이렇듯 ‘학산’은 절간과 사바를 넘나들며 예술혼을 불태워 오늘날 ‘김덕명’이란 이녁의 이름 석자를 우리 전통춤세계의 최고 반열에 올린 것이다.
선생은 또 서화에도 능해 현존하는 춤꾼들 중 글씨를 쓰는 몇 안 되는 예인으로, 춤판을 벌이기 전에 꼭 한편의 글을 쓴다고 한다. 이를테면 선생에게는 춤이 한편의 서체요, 서화요, 요지부동의 선비심인 것이다. 
 
지난 1979년에 한량무(閑良舞) 조사로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선생에게는 꼭 풀어야 할 한스러운 숙제가 하나 있다. 선생이 한량무 기능보유자이기는 해도 사람들은 ‘김덕명’하면 곧잘 ‘양산사찰학춤’을 떠올린다. 그런데 선생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양산사찰학춤’이 아직도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1976년에 김천흥, 서국영 박사 등 사계의 권위자들에 의한 ‘양산사찰학춤’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타당성 조사가 끝나, 이에 대한 조사보고서가 문화재관리국에 제출되었고 이후 통도사 방장 월하 스님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의 추천이 여러 차례 이어지는 등 뜻있는 이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심의보류 중인 상태라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 15년(서기 646년)에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한 이래 통도사 앞마당에서 추어졌던 춤으로 알려진 ‘양산사찰학춤’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그 진가가 널리 알려진 우리의 전통춤이다.

지난 88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에서 열렸던 ‘한국의 밤’에서 선생의 ‘양산사찰학춤’이 펼쳐졌을 때는 3천명의 내ㆍ외국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함으로써 평생 외곬수로 춤인생을 살아온 학산을 무한한 감동에 젖게 했다.

1987년에는 일본 NHK가 세계의 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양산사찰학춤’을 ‘춤의 황제’로 평가하고 이를 일본 전역에 방영하기도 했다. 또 1989년에는 KBS가 제작한 ‘한국백경’에 춤 부문에서는 유일하게 ‘양산사찰학춤’이 선정되기도 했다. 

“양산은 우리나라 춤의 발상지이기도 하고 국악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양산사찰학춤’은 우리나라 학춤의 모태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도 ‘동래학춤’이 부산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양산사찰학춤’의 문화재지정이 1976년 이래 이때까지 보류되고 있는 것은 얼른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는 ‘양산사찰학춤’의 역사성과 가치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기도 하지만, 지역이기주의에 의한 방해가 작용했다는 측면이 엿보입니다. 그리고 양산시의 미온적인 대처도 한 이유라고 보아집니다.”

다른 지자체에서는 없는 것도 찾아내서 고장의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터에 우리 양산에서는 세계인이 찬탄해 마지않는 보배로운 자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양산의 자랑거리로 육성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지난날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이 모자랐고 예산이 부족했던 때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제 인구 20만이 넘어 50만 시대로 향하고 있는 도시답게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야 지요. 그런데도 아직은 만족할 만한 변화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시민들도 양산예술의 예맥과 정통성에 대한 자긍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1969년부터 부산대학교 전통예술연구회 상임지도위원으로 후학을 양성해 왔던 선생은 진주시립국악원, 김해시립국악원을 통해서도 많은 문하생들을 배출했다. 그러다 지난 1995년부터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춤의 본바탕인 양산에 눌러 앉았다.  

이제 세상 연치 여든 둘, 아직도 기개와 기골이 젊은이 못잖지만, 세상사 내일을 알 수 없으니 노 춤꾼의 마음은 마냥 조급하다. 양산 예술의 예맥을 이어놓지 않고는 이녁의 삶을 마음 편히 마감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현재 ‘양산사찰학춤 보존회’ ‘양산전통예술보존회’에는 학산으로부터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해  한량무, 양반춤, 바라춤 등을 배우려는 문하생들이 줄을 잇는다.

이는 곧 이녁이 양산에서 배운 양산의 춤을 양산의 후학에게 이어 넘기려는 학산의 한갓 보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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