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여섯 살의 애송이(?), 그러나 이날 그의 연주는 청중들에게 지울 수 없는 깊은 감동을 남겼다. 그리고 그날 이후 세계는 라벨의 독주곡 전곡을 연주한 동양의 한 20대 피아니스트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성큼 지난 2005년 9월, 그 때의 그 젊은 피아니스트는 어느새 예순 살 초로가 되어 고국의 한 지방도시를 찾았다. 그가 바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다.흔히들 백건우를 ‘피아노의 구도자’, 또는 ‘건반 위의 순례자’라고 한다. 걸핏하면 초연, 걸핏하면 전곡 연주, 걸핏하면 듣도 보도 못한 난곡들에 도전해왔으니 그런 말들이 공연한 공치사가 아니다. 마치 구도자가 성지를 순례하듯 연주 인생 30년을 줄곧 치열한 탐구정신으로 살아온 그는 올 봄 세계적 음반사 데카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에 들어가 1차분으로 베토벤 중기 소나타(16~23번. CD 3장)를 내놓고는 곧바로 고국으로 날아와 전국 순회독주회 길에 나섰다. 평택문화회관, 원주치악예술회관 독주회를 거쳐 양산에서의 독주회를 위해 양산을 들른 9일 낮, 양산문화예술회관 무대에서 그를 만났다.-음악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네 삶에서 음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음악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죠. 옛 사람들은 이런 음악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소리가 빚어내는 화음은 사람들의 정신세계뿐 아니라 신체적인 활동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는 곧 삶을 조화롭게 하는 메커니즘이라고 믿었어요. 그러던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음악이 너무 상품화되고 장식품처럼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만, 음악이 갖는 철학적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음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흔히들 클래식음악은 특정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지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형식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음악은 본시 원시적 언어입니다. 존재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므로 누구나 다만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 녹음에 도전한 것이 세계적인 화제가 되고 있는데…
=집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어렸을 땐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음악도 여러 종류를 접하다가도 베토벤, 바흐로 돌아오게 됩니다. 저도 젊었을 땐 베토벤곡 연주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생각했었는데, 베토벤은 삶의 고통과 희열을 맛본 사람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어요. 그의 음악이 진정 가슴에 닿으려면 어느 정도 나이가 필요한 것인가 봐요. -동양인으로서 서양음악을 하는데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동안 좋은 스승을 만나면서 느낀 것인데, 그들의 철학이나 우리의 철학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또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은 그 출발점은 다를지 몰라도 만나는 점은 같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러므로 동양 사람이 서양음악을 한다는 것은 콤플렉스가 아니라 오히려 플러스가 될 수도 있어요. 묻고 싶은 말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연습을 해야 된다며 그는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저녁 7시 30분에 갖는 연주회까지는 아직도 3시간이나 남았는데…
과연 대가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싶어 슬며시 자리를 비켰지만, 연주회가 끝난 다음 다시 만날 요량이었다. 2005년 9월 9일 밤의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 양산문화예술회관의 객석을 빈틈없이 채운 청중들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만 이 시대의 걸출한 음악가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마지막 곡인 베토벤 소나타 제23번 f단조 작품 57 <열정>이 끝나자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실로 양산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러나 감동을 받은 것은 청중들만이 아니었다.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은 연주자도 크게 감동시켰다. 앙코르를 요청하는 박수가 끊이지 않자 연주자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마도 양산에는 클래식음악 마니아들이 많은가 봐요. 이토록 반응이 뜨거울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어린 청중들까지 감상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를 불러 준 오 시장님께 감사드립니다.”연주회가 끝나고 연주장 인근 한 음식점에서 오근섭 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는 양산시민들이 보여 준 환호와 성원에 거듭 고마움의 뜻을 전했다.“양산에 그토록 아름답고 훌륭한 연주장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었어요. 오페라나 대형 오케스트라를 위해서는 더 큰 공연장이 따로 필요하겠지만, 피아노 연주회를 위해서는 더 없이 만족한 연주장이었어요. 그리고 양산문화회관의 피아노(Steinway & Sons)는 세계적인 명품인데 대도시가 아닌 지방도시에 이런 명품이 있다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이예요. 양산시의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분야의 대가답지 않게(?) 마치 숫기 없는 어린아이처럼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의 예술관과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이웃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드러낸 피아니스트 백건우.
자정이 가까워서야 “불러주기만 하면 언제든 다시 양산을 찾아오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