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요절시인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의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르는 가을날, 누군가와 만날 것을 기약하는 것은 마냥 가슴 설레는 일이다.
햇살도 더없이 겸손해진 낮 시간, 통도사가 가까운 솔숲 속의 한 호텔 레스토랑은 적막하리만치 고즈넉하다.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기가 참 편하겠다 싶다. 좋은 스승을 만났던 것이 큰 복소프라노 김현경.
세월을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살아온 사람답게 창을 등지고 앉아 있는 자태가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어 보인다. 첫 만남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다.
얼핏 보기에는 50대 말이나 60대 초쯤으로 보이는데 나이를 가늠키가 쉽지 않다.“39년생이에요. 지난해에 재직하던 대학(부산대학)을 정년퇴임 했죠. 대학에서 명예교수 자리를 맡겨 주어서 학교와의 끈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96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양산중앙교회의 할렐루야성가대를 이끄는 일에만 전념을 하고 있습니다.”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주어진 책무를 다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여유로움이 엿보인다.
미당 서정주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이 오버랩 되는 초로의 이 성악가는 대체 언제부터 노래와 벗한 것일까?“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무용학원엘 다녔는데 노래는 저절로 해 지게 되더군요. 그리고 연극도 열심히 했어요. 철모르고 무엇이든 다 잘하고 싶었었죠. 그렇게 이것저것 다 관여하며 초등학교 시절을 즐겁고 신나게 보냈습니다.”마산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자란 그는 중ㆍ고등학교가 평준화되기 이전인 당시 경남지역의 명문이었던 마산여중에 입학을 하게 된다. 중학생이 된 어느 날, 어린 ‘현경’은 아버지로부터 부름을 받는다.
“예, 경아. 너도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남 앞에서 다리를 치켜 올리는 무용은 그만 했으면 좋겠구나. 아버지 생각에는 우리 경아가 노래만 했으면 좋겠다.”
꾸중을 하신 것도 아니고 야단을 치신 것도 아니었지만, 어린 딸은 두말없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마산지역은 물론 전국에 두루 이름이 알려져 있는 명망가였다.일찍이 동경제대 경제학부를 나와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현 경남신문의 전신인 남선신문의 사장을 거쳐, 1952년 4월에 초대 마산 민선시장으로 당선되고 1954년에는 제3대 민의원이 된 김종신(金鍾信 : 1904∼1978) 선생이 바로 그의 부친이다.
그의 부친은 그 이후에도 1966년 마산대학장(경남대 전신)을 역임했고 69년에 경남매일신문 제8대 사장과 마산문화방송주식회사 제2대 사장을 맡았으며 72년에는 마산문화TV방송주식회사 제2대 사장을 맡아 노익장을 과시하며 마산지역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펼쳤던 어른이다. 때는 6.25 한국전쟁 뒤끝이라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던 중앙의 내로라하는 음악인들이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활동을 하고 있던 때였다. 이것이 마산의 성악 꿈나무인 현경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복된 기회였다. 소프라노 전경애, 바리톤 김대근 등 당대의 대가를 직접 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성악 레슨을 받기 시작했어요.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난 덕에 제 성악 실력이 날이 갈수록 향상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 마냥 좋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음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좋은 선생님들의 훌륭한 지도를 받은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수재들만 가는 마산여고를 다니긴 했어도,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서울대에 간다는 것은 그 옛날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터인데 소녀 현경의 성악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던가 보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유학, 뻬스까라 음악원에서 성악 Diplom을 취득하고 돌아온 그는 곧바로 대학 강단에 선다.
때마침 부산의 동아대 문리과대학에 음악과가 개설된 시점이어서 그는 1967년 스무 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대학교수라는 레테르를 달게 된다. 그 뒤 부산대에 예술대학이 설립된 1982년에 부산대로 옮겨 지난해 정년퇴임할 때까지 줄곧 대학 강단을 지켰다.
아름다웠던 지난 날 반추하며 여생 보낼 터“세종대 교수이며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인 정은숙 교수, 신라대 김미성 교수, 이화여대 김상곤 교수 등 자랑스러운 후학들이 현역에서 열심히 활약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한갓 기쁨이고 보람이지요. 2000년까지 12회의 독창회를 가졌고, 여러 차례의 협연 무대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달란트를 마음껏 발산하였습니다. 지난 2003년 11월에는 정년퇴임 기념음악회도 가졌으니, 이제는 지나온 아름다웠던 세월을 반추하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까 합니다. 나이가 들면 남들은 모를지라도 자기 자신은 제 목소리가 옛 같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공연한 욕심만 앞서 물러날 때를 알지 못하면 추하게 되지요.”친정복, 시댁복, 자식복을 잘 타고나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행복한 삶을 살아온 것도 크게 감사할 일이지만, 신앙 가운데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것 또한 큰 축복이라고 말하는 김현경 교수가 양산에 삶의 둥지를 튼 것은 지난 1993년. 먼저 이승을 등진 남편의 유해가 양산에 묻혀있어 양산을 떠나고 싶어도 쉬이 떠날 수 없다는 그는 최근 들어 양산의 문화예술이 중흥기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반갑다고 한다. 좋은 공연과 연주회가 양산문화예술회관의 무대를 밝혀 부산 울산 등 인근 대도시의 관객들이 양산을 찾는 사례가 부쩍 늘면서 양산의 이미지가 이른바 문화도시로 격상되고 있는 듯하니, 모쪼록 이런 분위기가 잘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음악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미덕은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 주는 것입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마음에 여유로움이 생기고 마음이 여유로워지면 사랑을 하게 되지요. 클래식음악이라고 달리 부담을 가질 필요 없이 그냥 듣고 즐기다 보면 곧 친숙해 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산소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음악도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양분입니다.”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은 결코 변치 않는다는 신념으로 예순 일곱 생애를 노래해 온 이 노 성악가에게 남은 날들의 꿈은 무엇일까? “곱게 늙어가고 싶어요. 나이 들었다고 함부로 흐트러지거나 느슨해져서는 안 되겠죠. 적당히 긴장하면서 매일매일 충실하게 살고 싶은데 당장은 오는 2007년에 있을 양산중앙교회 50주년 기념음악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한 준비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 뒤에는 성가대의 지휘봉도 다른 사람에게 넘겼으면 해요. 목사님이 아시면 야단을 치시겠지만…”1993년에 부산음악상을 수상한 김현경 교수는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다. 막내딸만 이화여대를 졸업했고 서울대 음대 동문인 큰딸을 비롯해 아들과 며느리, 사위들이 모두 서울대 출신인 서울대 동문가족이라며 그윽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 가을 햇살처럼 포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