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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끝없는 배움의 길 걷는 참스승 김동진 교장..
사회

끝없는 배움의 길 걷는 참스승 김동진 교장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10/07 00:00 수정 2005.10.07 00:00
“역동적인 양산서 정년퇴임 하고파” /고결한 기품 지닌 연꽃 담은 사진 5천 점

부모님 뜻을 좇아 교직 선택

양산중부초등학교 김동진(金銅珍) 교장. 
김동진 교장의 지난 발자취를 아는 이들은 김 교장을 일러 학문을 향한 남다른 열정과 교직에 대한 소명감이 투철한 이 시대의 참스승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김 교장이 사진예술에 탁월한 조예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아는 이들은 다 안다. 그러나 김 교장 본인은 자신을 두고 교육자라고 부르는 것은 받아들여도 사진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한사코 마다한다.

“저는 단 한 번도 제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다 프로사진작가라고 불리는 것은 더욱 민망한 일입니다. 다만 사진이 좋아서 꽤 오랜 세월을 카메라와 벗해오긴 했지만 저는 그저 영원한 아마추어일 뿐입니다.”

하지만, 김 교장이 그동안 우리 들꽃과 연꽃을 촬영해 온 사진작품이 5천여 점이 넘고 그들 작품이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걸작품들이라는 알면 그가 결코 범상치 않은 사진작가라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사진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김동진 교장이 교육자로 살아온 지난 삶의 궤적을 살펴보자.

이제 오십 고개 중턱에 들어선 김 교장은 함양군 안의면 출신이다. 소백산맥의 동쪽 자락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고 있는 전형적인 산간분지인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는 여기서 초등학교와 중ㆍ고등학교를 마쳤다. 대학은 대처인 진주로 나가 진주교대에 입학하였지만, 그렇다고 김 교장의 어릴 때부터의 꿈이 교사였던 것은 아니다.

“건축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선친이 대목이셨는데 만년에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손에서 일을 놓으실 때까지 주로 사찰건립에 큰 공력을 들이셨지요.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자연히 ‘나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건축가가 되어야 하겠다’라는 뜻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 생각을 아신 부모님과 조부님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한학자이며 유사(儒士)인 조부님은 서원(書院)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어른이셨다. 그러므로 당신의 아들은 대목이 되었지만, 집안의 장손만큼은 반드시 학자가 되어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며 호통을 치셨던 것이다. 그러니 도리 없이 건축가가 되겠다는 꿈은 접을 수밖에… 어른들의 뜻에 따라 학업에 매진하기로 작정한 소년 ‘동진’은 초등학교 때부터 중ㆍ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줄곧 반장과 회장을 도맡아 하면서 학교공부에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다 그의 모교인 안의고등학교는 1994년에 공립으로 전환되기는 했지만, 당시만 해도 거창의 거창고등학교와 쌍벽을 이루는 서부경남의 명문사학이었다. 덕분에 산골소년으로서는 결코 만만찮은 도전이었을 진주교대에 어렵지 않게 입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7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는 곧장 고향인 함양의 안의면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교감으로 승진해 합천으로 떠나기까지 고향에서 21년 6개월 동안 평교사시절을 보냈죠. 지금은 폐교가 돼 안의초등학교에 통합된 동도초등학교가 저의 모교이자, 첫 발령지이기도 합니다.”

평교사 시절, 그는 낮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밤에는 마을에서 야학을 했다. 때문에 자연 가정에는 등한할 수밖에 없어 부인으로부터 “당신은 가정은 통 모르는 사람”이라는 지청구를 듣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가르치는 일이 마냥 즐겁고 신났던 그는 자청해 6학년 담임만 12년을 하면서 ‘장학생 제조기’라는 별명을 들었다. 일찍부터 영재교육에 눈을 떴던 것이다. 또 특수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어 5년간 특수교육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중부초등학교에 부임하면서 특수교사를 초빙한 것도 그때 이미 특수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 때문이다.

배움에 대한 열망, 후학들의 사표 

이렇듯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30년이 넘는 세월을 애오라지 교단만 지켜온 그에게 사진은 유일한 취미활동이다. 그런데 그는 사진을 찍으면서도 좀 유별나다 싶으리만치 특정 피사체만을 찾아다닌다. 인물사진이나 풍경사진도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특히 우리 꽃이 아닌 외래종 꽃에는 절대로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킨다. 그의 주요 관심 대상은 토종 들꽃과 연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연꽃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 왜 유독 연꽃일까?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랍니다. 그러나 연꽃은 결코 진흙에 물들지 않지요. 주변의 부조리와 더러운 환경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자라 아름답게 꽃피는 것이 가히 본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꽃이 피면 물 속의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연꽃의 향기가 온 연못에 가득합니다. 한 사람의 인간애도 이처럼 사회를 훈훈하게 만듭니다. 또 연꽃은 만개했을 때의 색깔이 곱기로 유명합니다. 활짝 핀 연꽃을 보면 저절로 몸과 마음이 맑아지고 포근해 지지요. 사람도 연꽃처럼 활짝 핀 듯한 성숙미를 지닌 인품의 소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김 교장의 연꽃 예찬은 끝이 없다. 그러면서 연꽃이 지니고 있는 미덕은 교직자들이 반드시 닮아야 할 덕목이라고 덧붙인다. 
김 교장은 연꽃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의 어디든지 찾아가 카메라의 앵글을 맞춘다. 전남 무안군의 ‘무안백련대축제’ 전북 전주시의 ‘전주연꽃예술제’ 경기 남양주의 ‘봉선사연꽃축제’ 경기 강화도의 ‘선원사연꽃축제’ 전남 보성군의 ‘대원사연꽃축제’ 전북 김제시의 ‘청운사연꽃축제’ 충남 부여군의 ‘궁남지연꽃축제’ 등 한반도 남녘 땅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연꽃축제는 안 가본 곳이 없고, 누군가로부터 연꽃이 피었다는 기별이라도 오면 한걸음에 달려간다. 
그렇게 제작된 연꽃사진은 누구든지 원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사진작업이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니 만큼 아무런 대가 없이 나누어 주어도 미련이 없다. 

“아직 정년이 8년 남았는데 퇴임하는 날부터 한 일주일쯤 한 차례 전시회를 열려고 합니다. 물론 그때도 전시작품 전량을 기증할 생각입니다. 그 때까지의 작품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비용이 만만찮을 것 같아 책 출판은 장담할 수 없어도 CD로 제작해 무료로 배포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CD제작은 제 손으로 직접 할 수 있는 일이니 크게 비용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김 교장이 양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합천에서 7년간의 교감생활을 끝내고 지난 2001년 9월에 양산교육청 장학사로 오면서다. 장학사로 2년 6개월을 재직하고 중부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때가 지난해 3월 1일, 김 교장의 양산살이도 어느새 4년이 지났다.  
김동진 교장은 배움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으로도 후학들의 사표가 되고 있다. 김 교장이 교대를 졸업했을 때는 교대가 2년제였을 때였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그는 당시 5년제였던 방송통신대학교 3학년에 편입해 학사(행정학사) 학위를 받고 뒤에 또 경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교육행정학)를 취득했다. 그러나 김 교장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금년 2월에는 경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교육과정 전공)를 받아 50이 넘은 만학으로 마침내 박사모를 쓰는 쾌거를 이루었다.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제게 학문의 길을 권해 주셨던 부모님과 조부님의 은덕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남편을 끝내 마다 않고 지금껏 잘 참아준 아내도 한없이 고맙고…”

슬하의 아들 둘이 다 장성하여 제가끔의 몫을 해내고 있는 것은 더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30이 넘도록 아직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맏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직의 길을 걷고 있고, 막내는 육군 장교(대위)로 복무하고 있다고 한다.
역동적인 도시인 양산이 자신의 취향에 맞아 이곳에서 교직을 마감하고 정년퇴임을 맞았으면 하는 것이 한갓 희망사항이라며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 활기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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