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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문화초대석] 조선사발의 명맥을 잇는 집념의 장인, 신정희..
사회

[문화초대석] 조선사발의 명맥을 잇는 집념의 장인, 신정희 선생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10/21 00:00 수정 2005.10.21 00:00
“도자기는 손으로 빚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만드는 것이야”

도자기는 곧 선생의 종교였다

하북면 지산리 574번지, 통도사 뒤 영축산 자락.
거기엔 반세기 동안이나 잊혀져 있던 조선사발을 다시 재현시킨 우리 그릇 세계의 실로 큰 그릇이 있다.

조선사발의 명맥을 잇는 집념의 장인, 신정희 선생이다. 70평생을 전통도자기 재현에 몸 바친 선생의 우리 그릇에 대한 열정은 이녁의 가마 속 장작불처럼 오늘도 뜨겁게 불타고 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에 경남 사천의 한 갯마을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사용하던 사기그릇과 오지그릇, 질그릇 따위에 남다른 관심을 가겼다.

그러다가 열여덟 살 때, 우연히 시인 김상옥 씨로부터 깨어진 청자 사금파리 하나를 얻은 것이 인연이 되어 그만 우리 그릇의 신비에 홀리고 말았다. 

그 때부터 무작정 전국의 가마터를 찾아 헤매며 옛 조상의 숨결과 손길이 어려 있는 사금파리들을 주워 모으는 가운데 선생의 나이 스물이 된 1950년에 6.25 한국전쟁을 맞았다. 당연히 그도 전쟁터로 불려갔다. 그러나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도 그의 배낭에는 사금파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군장 검사 때 이것이 발각되어 “너는 사금파리를 가지고 전쟁을 하느냐?”며 호된 기합을 받았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도자기밖에 없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딸린 식솔이 생겼다고 해서 사금파리에 대한 그의 집념이 떨쳐졌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내보고 ‘그릇 귀신이 들었다’고 하더군. 하기사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이제. 가정은 내팽개치고 천날만날 나돌아 댕기니 우째 그런 말을 안 듣겠소? 오죽하면 굿을 세 번이나 했을까. 그러는 중에 어느 날 딸아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는데, 그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하데. ‘내가 시방 무슨 짓을 하고 있노’ 싶기도 하고…”

딸의 죽음이 순전히 ‘내 탓’이라며 가슴을 쳤지만, 사금파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집밖을 나도는 가운데 가정을 꾸려나가는 일은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 되고 말았다. 당시 젓갈장사를 하며 어렵사리 자식들을 건사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생채기다.
 
“내 인생에 있어서 도자기는 내 종교나 마찬가지요. 이거를 어디 내가 누구한테 배웠남? 스승도 없이 그저 내 혼자,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러니 이건 내가 만든 나의 종교지. 도자기는 내 인생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렇다. 선생에게는 스승이 없었다. 굳이 스승을 찾자면 전국의 산야에 흩어져 있는 사금파리들이었다. 선생은 그 사금파리의 뿌리를 찾고 그것을 오늘에 재현해 내기 위해 이녁의 청춘을 오롯이 사금파리에 묻어버렸다.

당시에도 도예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생처럼 옛 조선 사발을 오늘에 되살려 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돈도 안 되고 아무짝에 쓸모없어 개 밥그릇 정도로 치부되던 막사발에 연연하는 선생의 모습은 한갓 부질없는 기행으로 비칠 따름이었다. “왜 이 필요 없는 것을 이토록 어렵게 만들려고 하십니까?”라며 노골적으로 충고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돈이 되고 안 되고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조선 사발을 재현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전통의 맥이 여기서 이대로 끊겨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승도 없이 옛 가마터에서 나온 사금파리 조각만 보고 생짜배기로 달려든 일이라 실패에 실패가 거듭되기만 했다. 만들고는 깨어버리고 깨어버릴 사발을 또 만들고…

전문가도 못 알아 본 완벽한 재현

계속해서 유약을 입히고 불을 때기를 수백, 수천 번 되풀이 하던 끝에 마침내 조선 사발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생은 드디어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들고 서울 인사동 고미술품상을 찾았다. “아니 이런 귀한 자기(瓷器)들을 다 어디서 구했소? 구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을 텐데…”라며 골동품상들은 다투어 선생이 가져간 작품 전량을 사들였다. ‘옳다구나, 인자 됐구나’ 싶어 날아갈 듯한 심정이었다. 당시 전문 감정가들조차 선생이 재현한 사발과 옛것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니 선생이 그토록 염원했던 조선 사발의 재현이 비로소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때가 1968년 말 무렵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처음 국내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의 도예계가 먼저 알고 “일본의 국보 ‘이도 다완’이 재현되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에 알려지고 난 뒤에야 국내에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생의 조선 사발 재현 현장이 신문과 방송을 장식했다. 이 때 찾아 온 기자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 선생은 무심코 “조선의 ‘막사발’을 재현했다”고 답한 것이 그대로 옮겨져 국내 매스컴이 일제히 ‘막사발 재현’ ‘500년 만에 되살아난 막사발’이라고 보도했다. 선생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 사발 중에서 일본인들이 가장 숭상하던 ‘이도 다완’이 정말로 ‘막사발’인 줄 알고 있었다.  

“내 무지의 소치였어. 우리 옛 사기장들이 오묘한 솜씨로 빚은 사발을 ‘막사발’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오. 남들이 부르는 대로 생각 없이 ‘막사발’이라고 한 것은 나의 가장 큰 실수였어요. 다행히 나의 큰아들이 조선 사발에 대한 오랜 연구와 조사로 ‘막사발’의 오명을 벗기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고 또 고맙기도 한 일이지요.”

선생의 국내 첫 전시회는 1979년 6월 15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롯데호텔 전시장에서 열렸다. 한국방송공사가 주최한 이 전시회는 해외동포 모국방문돕기 성금모금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그보다도 임진왜란 후 대가 끊긴 것으로 알았던 노란색유약 사발과 연회(練廻)항아리 등을 재현한 기술이 사반세기를 흙에 바친 한 장인의 집념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이전 일본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초대전을 가져 일본사람들을 크게 매료시킨 바 있다.
 
“우리 조선의 서민대중이 쓰던 사발을 일인들은 모완(慕碗)이라 하여 가보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어요. 우리 국민들은 그저 평범한 밥그릇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들은 내가 만든 전승사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가락지를 뺀 두 손으로 들어올려 보배처럼 감상하더군요.” 

선생의 도자기는 일본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지만, 이제는 국내에서도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이 무수히 많다. 일인들은 신씨가 재현한 비파색 분청사발을 가리켜 ‘환상의 그릇’이라고 칭했으며, 국내에서는 선생의 노란색 사발을 일러 ‘전승도예의 개가’로 평가하면서 모두들 경탄해 마지않았다. 70년대 당시 정계의 거물이었던 김종필 씨가 일본에 갈 때 선생의 작품을 가져가 선물한 것이 알려진 뒤로 한국 정부도 선생을 한국 도예계를 대표하는 도예가로 인정하게 되었고, 선생의 작품은 한국을 찾는 국빈이나 각국 외교사절들의 선물로도 요긴하게 쓰이게 되었다. 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선생의 작품이 전해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내 가마가 본시 경북 문경에 있었는데 지금의 가마가 있는 이곳 통도사 부근으로 이요해 온 것은 1975년이오. 그러고 보니 양산생활도 30년이나 되었구만.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그래도 ‘그릇귀신’이 들어 열병을 앓았던 때가 참 소중했던 시절이었어요. 내가 이 열병을 그토록 심하게 앓았기에 오늘날 우리나라에 조선 사발이 되살아났다고 확신하는 거요. 이제 내 나이가 일흔 여섯이나 되었지만, 그래도 ‘그릇 귀신’의 열병은 다 낫지 않은 것 같소. 아직도 우리는 조선의 옛 사발들을 옛 조선 사기장만큼 빚어내지 못하고 있거든. 다행이 내 자식들이, 또 내 제자들이 나의 뒤를 이어오고 있으니 이제 그들에게나 희망을 걸어볼 밖에…”

도자기가 이녁에게 ‘종교와 신앙’이었듯이 도자기의 길을 종교의 신앙처럼 믿고 나가는 그릇장이가 우리나라에 많이 탄생해 주기를 바라는 선생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도자기는 손으로 빚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만드는 것이다”며 “그릇을 빚을 때 한갓 형태에만 집착하지 말아라. 흙에서 꼬신내를 느껴야 비로소 사기장이 될 수 있다”고 거듭거듭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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