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기가 닥쳐오자 /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 그 중 몇 마리는 저 쪽 강둑이 아닌 /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복효근,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전문-
희생된 누우떼는 다른 누우떼를 살린다. 여기서 희생이란 의미를 너무 제한적으로 쓰지는 말자. 희생이란 항시 내가 아니라 남을 먼저 전제하는 말. 결국 우리 모두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 아닌가? 굳이 순국열사나 애국투사가 아니라도, 공원을 남몰래 쓸어주는 어떤 사람의 빗자루 같은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그리 편하게 쉴 수 있을 것인가? 지독한 쓰레기를 치워주는 어떤 사람의 마비된 코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찌 그리 편하게 먹고 마시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시답잖은 시이지만 괴롭게 읽어주는 누군가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그 되지도 않은 시를 쓴다고 충혈된 눈으로 새벽을 맞이할 것인가?
누우떼의 본능적 생존 방식과 인간의 본능적 생존 방식의 차이란 무엇일까? 이 시대의 속물근성, 비양심, 거친 자본의 논리… 단언컨대, 이 이기적인 시대에 남을 위해 이른 새벽 산속을 쓸어내리는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의 본능적 생존 방식이 될 것이다. 악의는 인간의 본능도 아니며 생존 방식은 더더구나 아니다. 악의(惡意)에 찬 시선이 어찌 사람을 잠시라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가. 우리는 선의(善意)라고 하는 인간의 본능 안에서 자유롭고 편안해질 것이다. 거대한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처럼, 우리 인간의 생존 방식인 오직 선의(善意)만으로...배정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