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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에 대하여..
사회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에 대하여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11/04 00:00 수정 2005.11.04 00:00

동네 뒷산을 오른다. 나와 같은 곳으로 갈 사람들의 비슷비슷한 차림새. 목적이 같으면 다 비슷해진다는 생각. 산길로 접어들면 몇 발짝 아래의 내가 사는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다.

마치 두 세계의 경계인 듯 산의 길목에 자리 잡은 절에서 흘러나오는 염불과 목탁소리를 배음으로 들으며 걸어가는 길은 고즈넉하다. 어렵고 먼 등산도 아니고 집에서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그 길이 너무 짧아서 아까운 마음에 괜스레 동네를 휭 하니 둘러서 산으로 가거나, 가는 길에 보이는 공원을 몇 바퀴 돌다가 오르기도 한다. 동네 뒷산을 오르는 일이 자꾸 좋아지는 것은 일주일에 한번만 가질 수 있는 시간이어서 그런 까닭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소란스럽지 않아서이다. 나는 이 시간만은 온전히 소리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맑은 공기와 나무 냄새가 머릿속을 깨끗이 청소해 주는 그 길을 별 생각 없이 오르는 것은 생활의 축복이다. 산으로 접어들어 20분쯤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잘 다듬어진 체육공원이 나온다. 나는 언제나 정갈하게 비질된 땅바닥을 볼 때면 우렁각시처럼 살며시 나와서 그 바닥을 쓸었을 마음씨 고운 누군가를 생각한다.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슬프고 아름다운 시 하나.
 
건기가 닥쳐오자 /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 그 중 몇 마리는 저 쪽 강둑이 아닌 /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복효근,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전문-

 
희생된 누우떼는 다른 누우떼를 살린다. 여기서 희생이란 의미를 너무 제한적으로 쓰지는 말자. 희생이란 항시 내가 아니라 남을 먼저 전제하는 말. 결국 우리 모두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 아닌가?  굳이 순국열사나 애국투사가 아니라도, 공원을 남몰래 쓸어주는 어떤 사람의 빗자루 같은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그리 편하게 쉴 수 있을 것인가? 지독한 쓰레기를 치워주는 어떤 사람의 마비된 코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찌 그리 편하게 먹고 마시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시답잖은 시이지만 괴롭게 읽어주는 누군가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그 되지도 않은 시를 쓴다고 충혈된 눈으로 새벽을 맞이할 것인가?
 
누우떼의 본능적 생존 방식과 인간의 본능적 생존 방식의 차이란 무엇일까? 이 시대의 속물근성, 비양심, 거친 자본의 논리… 단언컨대, 이 이기적인 시대에 남을 위해 이른 새벽 산속을 쓸어내리는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의 본능적 생존 방식이 될 것이다.

악의는 인간의 본능도 아니며 생존 방식은 더더구나 아니다. 악의(惡意)에 찬 시선이 어찌 사람을 잠시라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가. 우리는 선의(善意)라고 하는 인간의 본능 안에서 자유롭고 편안해질 것이다. 거대한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처럼, 우리 인간의 생존 방식인 오직 선의(善意)만으로...

배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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