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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나무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11/11 00:00 수정 2005.11.11 00:00

아직 전교조 총투표 결과가 나오지 않아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번 토요일에는 교육부에서 일방적으로 강행하려 하는 ‘교원평가’에 대한 반대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연가투쟁을 떠나기로 잠정 결정했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교육부와 전교조가 의견 차이를 보이는 심층에 대한 언급은 없이 교육부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사실 40만 교원 가운데 금품수수를 요구하거나, 일상적으로 폭언ㆍ폭력을 행사하거나, 성추행을 하거나, 교과를 가르칠 능력이 모자라는 것 중 어느 하나에라도 해당되는 부적격자가 교육 현장에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가투쟁을 하겠다고 밝히는 것은 -학생들의 수업 결손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하고 떠난다 하더라도- 자칫 제 밥그릇이나 지키려고 욕심내는 사람으로 오인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교원평가 반대집회’에 참여하려 하는가?

전교조가 ‘교원평가’를 반대하는 것은 그런 부적격 교사를 비호하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교조는 오히려 그런 부적격 교사가 발붙일 수 없는 교육풍토를 위해 실정법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도 교육부에서는 전교조에서 요구하고 있는 가능한 실정법의 엄격한 적용과 교육여건 개선, 교원의 교장과 교감 평가, 교육청 및 교육부 평가는 뒤로 미룬 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교원평가만 강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원평가’ 가운데 교사 상호간의 평가와 학생의 교사 평가는 인기투표식 평가가 될 것이 뻔한 항목이라는 것이다.

교육의 질에 대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교육을 단순한 시장 논리만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엄청난 사교육비 지출을 요구하는 지금과 같은 우리 사회의 교육 여건 속에서 교육에 지나친 시장논리 도입을 강조하는 것은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철저히 보장받으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음모세력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전교조다.

그렇다고 해서 전교조가 100% 다 옳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온전히 옳기만 한 것은 없다. 여러 세력 중 상대적으로 더 옳고 앞으로 옳은 길로 갈 가능성이 더 높다면 그 가능성이 51%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 세력이 나아가려는 쪽으로 힘을 밀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무는 / 실로 운명처럼 /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 그런 자세로 / 평생을 산다. // 철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 소란한 마을길 위에 // 스스로 펴는 / 그 폭넓은 그늘……. // 나무는 /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 천 년의 강물이다. - 이형기의 <나무> 전문

이 시에서 나무는 슬픔 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에게 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며 등불 같은 모습으로 천 년 세월의 흐름 속에 꿋꿋이 서 있다.

연가투쟁 같은 것 하지 않고도 등불을 켠 채 드리운 그늘을 넓히며 백년의 강물을 서서 건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시비비(是是非非) 따지지 않아도 저절로 옳고 바른 길을 보여줄 수 있는, 늙을수록 아름다워지는 나무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학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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