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전에 그에게 연시 만원어치를 사고 플라스틱 소쿠리를 돌려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도 아마 나에게서 그 소쿠리를 돌려받을 생각은 없었으리라는 막연한 확신으로 미안함을 얼버무리고 있다. 사이사이 때가 낀 그 소쿠리의 모양새가 그런 확신을 불어 넣어 주었다.
나는 오늘도 빛깔 고운 연시에 눈이 머물고, 이가 없어서 물렁한 것만 찾던 한 시인을 떠올리며 다음에 그를 만날 때면 연시와 묵을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저리 빛깔 고운 홍시를 보고도 마음이 술렁거리는 시 한 구절도 생각지 못하고, 그저 달콤함과 부드러움과 고움에만 생각이 미치니, 그건 아마도 박용래가 쓴 <연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버려도 좋을, 때 낀 소쿠리 같은 시를 또 써서 무엇하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박용래, <연시> 전문
박용래가 말을 아꼈듯이 나 또한 말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개운치 않은 몇 마디 말을 덧붙이기로 한다. 시에 덧붙이는 말은 대부분이 사족인 경우가 많다. 어떻게 읽은들 문제가 되겠는가?땡볕이 연시로 익었으니 고통이 감미로운 열매를 맺었다고 읽어도 좋고, 비름 잎에 꽂힌 땡볕이 난데없이 이웃 마을의 연시로 익었으니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인연이라고 읽어도 좋고, 그게 바로 자연의 오묘한 이치 아니냐고 말하여도 좋다.늦가을 서리에 고요히 익은 감이 뚝딱 따여서 눈 오는 어느 저녁, 경건한 집안의 제사상에 놓이는 연시의 팽팽한 아름다움. 그기에 연시의 죽음이란 없다. 다른 이의 죽음을 밝히는 등잔으로 다시 살아나는 연시의 미학.
작은 것으로 넓고 아득한 아름다움을 말하는 시인의 눈이 깊다.배정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