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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입시추위
사회

입시추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11/25 00:00 수정 2005.11.25 00:00

입시 추위가 사라졌다.

해마다 수학능력시험 보는 날이면 없던 추위도 생겨나 어김없이 추웠다. 우연도 세 번 이상 계속되면 거기에 어떤 필연이 숨겨져 있나 의심해 보라 했다. 그런데 입시 추위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수십 년을 두고 어김없이 찾아왔었다.

그것은 수십만이 넘는 수험생과 그 수험생을 둔 그들보다 더 많은 가족들이 품은 독한 마음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 독한 마음이 하늘에까지 사무쳐 입시추위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이다.

한데 작년부터 입시추위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그런 말들이 잘못된 것이었을까ㆍ 그런데 나는 오히려 입시추위가 없어진 것을 보며 사람에게 정말 기(氣)라는 것이 있긴 있구나 하고 있다.

작년부터 수능시험을 보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수능시험을 볼 고3 학생의 절대수가 줄었다. 졸업생 수보다 대학의 모집 정원이 더 많아져 수능시험 보지 않아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수시1차와 2차에 합격한 학생 중 대부분이 수능 응시 여부와 관계없이 최종 합격했기 때문에 응시자가 예전보다 더욱더 줄어든 것이다.

거기다가 수험생들의 시험 편의를 위해 수험장 수를 늘리고 엄격한 시험 감독을 위해 감독하는 선생님 수까지 늘리는 바람에 이날 하루 쉬는 중ㆍ고등학생들이 엄청나게 많아진 것이다. 이들 쉬는 학생들의 온기가 시험을 보는 학생들이 쏟아내는 냉기보다 많아졌기 때문에 입시추위가 없어진 것이다.

어떻든 춥지 않아 좋다며 1교시 언어영역 시험 보는 교실로 갔다. 아이들 시험문제를 넘겨다보니 몇 년 전에 나왔던 시가 또 나왔다.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 늘 그대 뒤를 따르던 / 길 문득 사라지고 /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 여기저기서 어린 날 /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 성긴 눈 날린다 /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 몇 송이 눈.
 황동규의 〈조그만 사랑 노래〉전문

사랑노래다. 사랑노래이긴 한데 사랑의 기쁨이 아닌 아픔을 노래한 것이다. 너에게 갈 수 있는 길도, 길 아닌 것도 사라졌다. 마음이 얼마나 추울까. 그래서 '추위 환한 저녁 하늘'이다.

쨍하니 매서운 추위는 티끌 한 점 없이 맑은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린다. 차가운 시베리아 고기압이 쏟아 내리는 찬바람 속에 먹물을 풀어놓은 것 같은 하늘엔 찬찬히 깨어진 금 같은 별들(깨어진 내 사랑)이 환하게 박혀 있다.

구름은커녕 티끌 한 점 없는 하늘인데 어디서부터 날아온 것일까. 성긴 눈 몇 송이 폴 폴 폴 언 땅에 내려앉지도 못하고 한없이 떠다니고 있다. 이 성긴 몇 송이 눈이 바로 사랑을 잃은 화자의 모습이다.
 

11고사실. 2교시 수리영역 시험시간. 28명 중 4명 결시. 23명 미응시. 1명 응시. 3교시 외국어 영역 시험시간. 28명 중 8명 결시. 3명 미 응시. 응시자 17명 중 12명이 70분 시험 시간 중 20분도 안 되어 답안 작성까지 끝내고 잔다.

시험 보는 교실 안은 온풍기 바람으로 따뜻하기만 했지만 나는 언 땅에 내려앉지도 못하고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이 되어 있었다.

입시 추위는 사라진 게 아니다. 바로 교실 안으로 들어와 이렇게 맹위를 떨치고 있다.

시인 문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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