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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천사와의 씨름
사회

천사와의 씨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5/12/16 00:00 수정 2005.12.16 00:00

천사라 하더라도,
이 땅의 몸을 입은 천사 똥은 지독하지
코를 막고 인상을 써도 어쩔 수 없지
어찌할 바를 몰라 마구 소리를 질렀는데
이래도 되는 건지?
화장실 벽면에 포로처럼 등 돌려 세워놓고
"손 내리면 안돼요" 몇 번을 말하며 소리쳐도
바람 빠진 공처럼 자꾸만 오그라드는 천사
할미 천사
샤워기로 물 뿌리자 어! 어! 하는 천사
변기에 그린 그림(난생 처음 보는 그림이지만)
애써 지운다는 게 황칠이 되고
그러고도 평화스레 잠드는 천사
 
얍복강가는 아니라도 천사와의 씨름을
이기고 진 바 없어도 한 밤 내 마른 눈물을
이상도 하지 씨름 끝에 허물 벗듯 한 겹
투명하게 넓어지는 또 다른 세상
이희철, <천사와의 씨름을> 전문
 
창세기 32장 23~30에서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그의 식솔들을 다 보내고 홀로이 남았더니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하였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아침 저녁으로 씻기고 돌보느라 친한 친구들과 술 한 잔도 마음 편히 하지 못한다는 시인의 근황을 듣자, 지난 여름에 읽은 이 시인의 작품이 떠올랐다.

작품을 읽으면서 혹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치매에 걸린 노모를 돌보는 착한 이웃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오랜만에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날이라며 친구들을 찾아온 사람. 벙거지를 쓰고 몇 번이나 길을 물어 찾아온 시인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나중에 모자를 벗었을 때 시인의 머리가 많이도 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놓은 노모를 돌보는 것이 어찌 고달프지 않겠는가마는 그는 "버리지 못할 약속"을 지키는 것일 뿐이라고, 그것이 이미 자신의 유전자 속에 결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똥을 싸는 천치의 어머니는 이 땅의 가여운 천사. 스스로에게 버리지 못할 약속을 지키느라 흰 머리카락이 늘어난 시인의 모습도 순백의 마음을 지녔을 천사가 아니겠는가.
 
꼭 세 병만 먹고 일어서리라던 자리는 자꾸만 길어지고 있었다. 시가 뭐냐고, 시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그보다 버리지 못할 약속이 있어 독서도 시도 잠시 잊었노라고, 인생이란 결국 묘용(妙用)이 아니겠느냐고, 시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미루어 둔 이야기들―시인들의 이야기란 대개 시이거나 시적이거나 둘 중 하나이니, 그다지 재미는 없다―로 밤이 깊어가고, 아쉬운 마음에 자리를 옮겨 또 한 잔 하자 한다.

나는 내일 일을 핑계로 그 다음 술자리에 참석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은 아마 밤을 새웠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이 시인이 지금의 괴로움을 통해 더 맑고 아름다운 시를 쓰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의 별빛은 무척이나 청청하였다.

배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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