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설날의 어원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 우선, 설날을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뿌리를 찾는 견해가 있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이란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설날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해에 통합되어 가는 전이과정으로, 아직 완전히 새해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그러한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다음으로 설날은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 이라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이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날을 ‘삼가다(謹愼)’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인데, 이 말은 완전히 새로운 시간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라고 한다. 한편 설날은 원일(元日), 원단(元旦), 정조(正朝), 세수(歲首), 세초(歲初), 세시(歲時), 연두(年頭), 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린다. 그러나 이 많은 한자어보다는 ‘설’이란 토박이말이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더 깊게 배어있는 말이다.
설날의 유래설날의 유래를 더듬어보자면 역사적인 기록을 통하는 것이 한 방법이겠다. 《수서(隨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군신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적혀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곧 오늘날의 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정월 조상제사와 오늘날의 설날 차례가 유사성이 있다는데 연관지어 설날 유래로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 : 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설날 풍속이 형성된 시점으로 미루어 보기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이 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설날 수난그런데 우리 민족사가 그렇듯 한민족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우리 고유의 전통명절인 ‘설날’에도 숱한 수난이 따랐다. 구한말인 1895년에 양력이 채택되면서 양력 1월 1일을 신정이라 하고 이와 구별하여 ‘설날’을 구정으로 부르게 되면서 ‘설날’의 빛이 바래기 시작하더니,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제에 의해 ‘설날’은 본격적인 시달림을 당하게 된다. 저들 일제는 수천 년 동안 우리네 민간에서 지켜 내려온 한민족의 ‘설’을 말살하고자 갖은 술수를 다 부렸다. 예를 들면 떡 방앗간을 섣달그믐 전 1주일 동안은 못 돌리게 하였고, 설날 아침에 흰 옷을 입고 세배 다니는 사람을 보면, 양력설을 쇠지 않는데다 또 무색옷을 입지 않고 흰옷을 입었다 해서 검은 물이 든 물총을 쏘아 흰 옷에 검은 물이 얼룩지게 하는 등의 박해를 가하였다.광복 후에도 여전히 이승만정권은 이중과세를 방지한다는 구실로 신정 쇠기를 강요하고 음력설, 즉 우리 고유의 설을 쇠는 것을 구박하였다. 이 구박은 박정희정권까지 이어졌다. 그래도 일반서민들과 민중들은 끝까지 ‘설날’을 지켜냈다. 박정희정권시절엔 공무원들이 2중과세를 하다 들키면 혼찌검이 났고 공장폐쇄도 불사했다.
그래서 공무원들과 국영기업체 근무자들이야 어쩔 수 없이 설날을 모른 척 했다.
하지만 일반공장의 근로자들은 회사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고향을 찾아갔고 시장의 상인들도 아예 철시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흔히들 ‘삼천만의 대이동’이라고 표현했듯이 이 나라의 민초들은 아무리 정권의 핍박이 심해도 ‘설날’만 되면 고향을 찾아가 조상숭배의 예를 다 했다. 이런 일이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해마다 벌어지다 보니 결국은 정치권도 손을 들고 말았다. 전두환정권은 1985년에 이르러 그때까지 ‘구정’으로 부르던 ‘설날’을 ‘민속의 날’로 고치면서 공휴일로 정했고, 그 뒤 노태우정권은 1989년에 비로소 ‘설’이라는 이름을 되돌려 놓았다. 지금처럼 ‘설날’을 앞뒤로 사흘간 연휴가 된 것도 그때부터다.이것만 보아도 한국의 민중의식은 참으로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권력에 아부하여 이리 저리 몸을 팔고 다녔어도 민초의 생각과 의식은 늘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서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