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미스
눈이 커서 슬퍼 보이는 자나카, 엔사의 부끄러운 듯한 미소
― 수미트는 안 왔나요?
― 수미트 행님, 일해요.
누군가 분명히 형님이라고 가르쳐 주었을 테지만, 그들은 언제나 행님이라 말한다.
행님, 행님, 수미트 행님. 그건 영어의 브라더가 아니라 브래드 정도 되는 변용일까?
아니다.
형님(브라더)이 빵(브래더)이 돼?
어눌한 어조의 이방인들. 나는 그들의 어조에 익숙해진다.
나는 그들에게 "질문하세요" 라고 말하지 못하고, 간단히 "퀘스쳔"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다 알아듣는다. ―미스, 뭐라카노
순간 아뜩해진다.
나의 짧은 영어로 "뭐라카노"를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그러니까, 음음 나는 당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아이 돈트 언더스탠드 유어 워드. 다시 한번 말해 주세요.
아이 백 유어 파든?
그들은 그 순한 눈을 껌뻑거리며 내 말을 들으면서 나의 곤란한 영어에 미소 짓는다. 아, 말의 난처함이여.
지금 이 세계에서의 낯설음이란 결국 언어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피부색이나 종교, 석유, 성격 등의 문제가 왜 언어가 있음에도 늘상 말썽인가?
깊은 바다가 걸어왔네
나는 바다를 맞아 가득 잡으려 하네
손이 없네 손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손이 없어서 잡지 못하고 울려고 하네
눈이 없네
눈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허수경, <바다가> 전문
시인이 독일에 있는 동안 씌어진 이 시는 이국에서의 고독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결국 그녀가 두고 간 근원적인 것은 모국어가 아닐까? 우리는 모두 자기가 있는 곳의 말을 익히지 못한다면 손도 없고 눈도 없고 혀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시인이 낯선 나라에서 느꼈을 그 슬픔은 아는 사람 집(고국)에 두고 온 그 말(모국어) 때문이리라. 자나카와 엔사는 그리움도 눈물도 모국어도 모국에서의 꿈도 다 그들의 나라에 두고 왔다.
하루의 피곤한 노동 뒤에도 한 시간씩 이방의 말을 연습하는 자나카.
그의 한국어는 그의 친구들보다 어눌하고 느리지만, 그가 돌아가면 한국의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온 것들이 생각나리라. 배정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