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3월 개학 전까지는 제법 피겠지?” “응, 그런데 이런 차림으로 매화 보려니 매화한테 부끄럽네. 부처님이야 다 이해하겠지만” “이사 오면 매일 뵐게요” 아내가 천왕문 나서며 사천왕께 하직 인사를 한다.“하루 헐어 잠깐이듯 올 봄 역시 잠깐이면 왔다가겠지?” “그렇겠지. 마흔 될 때 그 막막하던 느낌이 아직 이렇게 생생한데 벌써 쉰이잖아. 예순도 일흔도 잠깐이겠지 뭐” “당신, 사월이란 시 생각나게 하는 말이네”날 들어 햇살 쏟아지자 사흘밤낮 술렁이던 떡갈나무숲은 가슴속 깊이 갈무리해두었던 등불마다 기름 부어 가지 끝끝 연둣빛 불길 밝히고 퇴색한 마른 풀대 아래 납작 엎드렸던 쑥, 냉이, 벼룩이자리 어린 순 머리 풀어 기지개 켠다 민들레 길다랗게 목 뽑아 올려 멀리 살피고 벚나무 꽃맹아리 팝콘처럼 하얗게 가슴 부풀 듯재깔재깔 와그르르 짝짝이 쏟아져 나오는 토요일 한낮 큰놈 버들치가 중치 버들치 좇아 짓궂게 군다 피라미 피라미끼리 참마주 참마주끼리 어울리고 장난치고 짝짓는다 (중략)마흔에도 쉰에도 사월은 첩첩 불길 더 환하여 지상이 천상보다 향그럽다
졸시 <사월>부분역시 봄이 좋아. 세상 어떤 게 소생하는 기쁨만할까.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漢江水)나 낙동강(洛東江) 상류(上流)와도 같은 융융(融融)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골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질거운 웃음판이다.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뜨리는 몸뚱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네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팩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ㅅ굼치까지도 이쁜 꽃숭어리들을 달었다. 맵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새끼들이 조석(朝夕)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만(數十萬) 마리의 꿀벌들이 왼종일 북치고 소고치고 마짓굿 올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當然)한 일이다.우리가 이것을 사랑할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무쳐서 누워 있는 못물과 같이 저 아래 저것들을 비취고 누워서, 때로 가냘프게도 떨어져 내리는 저 어린것들의 꽃잎사귀들을 우리 몸 우에 받어라도 볼 것인가. 아니면 머언 산(山)들과 나란히 마조서서,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분면(油頭粉面)과, 한낮의 춤과, 황혼의 어둠 속에 이것들이 자자들어 돌아오는 - 아스라한 침잠이나 지킬 것인가. (하략)
서정주의 <상리과원> 일부“너무 이쁘지?” “젊다는 것 말고 이쁜 것 없는데?” “젊음보다 더 이쁜 것 어디 있어. 천하없는 미인도 늙어 이쁘진 않잖아” “하하, 그렇긴 그래. 하지만 홑겹의 아름다움이야. 작품 사진 보면 열 일곱 꽃봉오리 같은 소녀 찍은 것은 잘 없잖아. 자글자글 주름진 노파 사진은 있어도. 겹겹이 아름다움 감춰둔 얼굴은 나이 들어서나 가능하기 때문일 거야. 당신도 그렇게 늙어 봐”흘겨보는 아내의 얼굴이 풋풋한 봄이다.문학철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