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했던가. 가까운 것에 오히려 더 어두운 경우가 가끔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가까운 곳에 좋은 것이 있는 것 모르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우리 양산에서 시 전문 순문학 잡지를 30호 째 내고 있다. 울산은 거의 모든 것이 양산보다 대여섯 배 이상 큰 규모이지만 이런 잡지가 없다. 경남에도 이런 연륜을 갖춘 잡지가 없다. 부산, 울산, 대구, 경북 그리고 멀리 서울까지 편집동인들이 포진해 있지만 ≪주변인과 詩≫는 양산에서 나온다.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까지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말 그대로 등하불명이다.우수(雨水), 경칩(驚蟄) 지난 일요일 아침, 늦잠 자는 녀석들 깨우지 않고 살짝 나와 통도사 본절 앞 문필봉에 올랐다. 집에서 나서 놀걸음으로 걸어 반시간이면 봉우리 정상이다. 문필봉 오르는 길은 마을 사람들이 아침 운동 겸 산책로로 즐기는 언덕길이기도 해서 예닐곱 번 익은 얼굴들 만나 인사 나누고 길 양보하고 양보 받으며 올랐다.경제적으로 순문학 잡지 발간이 예나 지금이나 어렵지 않았던 적이 있을까마는 다른 것에 기대지 않고 내부의 힘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어렵사리 30호까지 밀고 왔다. 3호 낼 때 너무 힘들어 첫 세 걸음을 넘어지지 않고 걷는 아이는 열 걸음도 백 걸음도 잘 걷게 된다고 희망사항을 말했었는데 그 희망대로 풀리려는지 ≪주변인과 詩≫가 어언 통권 30호다.“공화국 북반부에서도, 요즘은 / 얼음보숭이라는 말 잘 안 씁네다 / 아이스크림이라면 다 알아듣습네다” // 아쉽습니다, 정말 아쉽습니다 / 먹어보지도 못하고 녹아버릴 / 아름다운 이름이 어디 / 얼음보숭이 뿐이겠습니까 (권경업의 <녹아버린 얼음보숭이>)정인화 시인이 29호 출판기념회 도중 신작시 돌려가며 낭송하기 중 “서른 살이면 이립(而立)인데 한 명의 독자 입장에서 평가하여 말한다면 ≪주변인과 詩≫는 ‘당대 현실을 책임질 노선’이 선명하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웠어요.”라며 읽었던 시다.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하나의 잡지가 깃대를 잡고 길을 열어 나가기에는 이미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복합적이다. 우리 잡지를 이끌어가고 밀어가는 편집동인들의 성향 역시 하나나 둘로 나누어 묶기 어렵다.분명한 하나는 높은 곳에 서면 멀리 보이고 낮은 곳에 엎드리면 살갗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큰 목소리가 큰 울림을 불러오기 쉽겠지만 거기에 자칫 참이 아닌 것이 끼어들면 공허한 메아리가 될 여지가 많아진다. 작은 목소리 속에라도 진실한 감동이 묻혀 있을 때 그 작은 감동이 세상을 물들이고 바꾸는 큰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삶의 진실한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낮은 언덕 문필봉을 오르며 본 나무들 한겨울과 달라진 것 없는 것 같지만 꽃봉오리 내민 진달래도 보이고 잎사귀 먼저 내미는 철쭉도 보인다. 오리나무 잎사귀 벌써 엄지손톱만하고 찔레덩굴엔 물이 올라 푸르다. 나무들 아래 길섶엔 양지꽃 잎사귀 조밀조밀 돋았다.기획특집 시인을 만나다는 지령 30호 기념으로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익숙한, 청년보다 젊은 노 시인 이생진 시인을 모셨다. 그리고 이번 호부터 한 지역 시인들을 집중 조명하기로 하여 울산 지역 시인들을 신작시에 많이 초대하고 울산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변방] 동인을 만났다. 작은 시집으로 참여하는 김진희 시인의 시랑 신작시, 독자시까지도 모두 따뜻한 가슴으로 읽어준다면 좋겠다. 봄은 계절을 밟아 오지만 우리 가슴을 디디고도 온다.문필봉 오르는 낮은 언덕 마루 세 곳에 서 보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런 아름다운 것이 있구나 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난다. 18일 토요일 통도사 아랫마을에서 ≪주변인과 詩≫ 통권 30호 출판 기념회를 한다. 관심 있는 사람들과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문학철 / 시인